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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복음의 고상한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2018-09-05 (수)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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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을 설명하는 데는 여러 논리가 동원된다. 본능 논리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동물은 철저히 본능적인 존재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싸우고 싶으면 싸운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자연적 본능에 도덕성을 부여해 그것을 극복하고 다스리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그 때문에 본능에 충실한 사람은 비도덕적인 자로 간주되기 쉽다.

인간은 그래서 본능 이상의 존재다. ‘본능 이상’이란 그들에게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추구해야 할 신념 같은 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어른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의식이 뜨이기 시작하는 두세 살짜리 아이도 걔 나름대로의 추구가치가 있기에, 인간 대부분은 그 추구하는 가치에 종속되어 산다.

인간이 추구하는 신념이나 가치체계 중 가장 확고한 것은 아무래도 종교일 것이다. 종교는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를 가시적인 이 세상 속에서 우러러보겠다는 자세다. 놀라운 건, 어떤 물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세가 너무 견고해 그 종교세계에 몰입한 사람은 쉽게 무너뜨릴 수가 없다. 그만큼 인간의 신념체계로서 종교는 아주 강력한 대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전혀 고급스럽지 않은 방향으로 튈 때 발생한다. 얼마 전, 현재 한국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 기독교 단체에 관한 탐사 프로그램을 시청할 기회가 있었다. 기독교적 용어로 말하면 그들은 ‘이단’으로서, 정통 기독교에 기생하며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논리와 행동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는 사회의 암적 존재들이다. 예를 들어, 그들은 성경에 전혀 없는 교리를 끄집어다가 그들 모임에서 사람을 구타한다. 그들은 그것을 ‘타작마당’이라고 부른다. 성경에 나오는 타작마당이 일종의 영적 자기반성의 일환으로서 사람을 때리는 걸 말하고 있단다. 목사로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아주 기이한(!) 말이다.

화면에 나오는 장면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한다. 청소년 딸이 엄마 안에 있는 죄의 독을 빼낸다면서 앉혀놓고 엄마의 뺨을 사정없이 두들긴다. 딸한테 뺨을 맞은 엄마 역시 흐느끼면서 딸의 뺨을 세차게 갈긴다. 그 집단의 교주라는 여자 역시 교인들을 앞으로 나오라고 해 한 사람씩 세워놓고 뺨을 후려갈긴다. 그 뺨을 아무 저항 없이 맞고 있는 이들은 그 여자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노인들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속이 많이 상했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속상했던 이유는 내 인생을 건 기독교 가치의 고상함이 그들로 인해 현격하게 떨어져버렸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 기독교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 구원, 죄인, 속죄, 은혜, 교회, 순종 등, 다 성경에 나오는, 또 교회에서 쓰는 말들이다. 그 고상하고 좋은 말들을 그런 저급하고 천박한 속임수에다 갖다 붙임으로써 그 격을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정말 속상했다.

요새 다들 한국교회가 총체적 위기에 처했다고 말한다. 동의한다. 이에 동의하면서 내가 제기하고 싶은 그 치명적 원인은 이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기독교의 고상함을 무너뜨리는 데 다들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서는 경건하다. 하지만 밖에 나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불의를 행한다. 교회의 몸집을 부풀리기 위해서라면 못하는 게 없을 정도다. 자식에게 회사 물려주듯, 자식에게 교회도 물려준다. 우후죽순 무인가 신학교에서 양산되는 목사들 때문에 사회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교회가 거의 양팔간격으로 세워지고 있다. 복음의 희소성 가치 같은 걸 말하는 게 사치가 되어버렸다. 다 복음의 고상함을 세상에 팔아넘기는 모습들이다.

요새 갈라디아서라는 책을 설교하고 있다. 설교자인 내 자신부터 바울 사도의 확고한 신념을 배우는 중이다. 그는 그 아름다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그것을 쉽게 내다버린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촌철살인의 책망을 가한다. 복음의 아름다움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늘 앞선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이 복음을 앞서나간다. 여기서 늘 문제가 생긴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이단만 탓할 것인가? 아니다.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복음은 아름답고 고상하다. 복음의 고상한 가치를 우리 스스로 격하시키지 않도록 주의하라.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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