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쯤 된 이들이면 어릴 때 누구나 다 만화를 좋아했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호주머니에 돈 좀 생기면 곧장 달려간 곳이 동네만화방이었다. 얼마나 몰입해 읽었는지 아직도 그때 그 만화들에 등장했던 캐릭터들과 작가들 이름까지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중에 유독 한 만화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잘 등장하곤 했는데, 그 만화가는 그들을 그릴 때마다 그들의 한 신체적 부위를 강조했다. 그 부위가 바로 그들의 쭈글쭈글한 입이었다.
내 나이 오십 중반쯤으로 기억된다. 난 그 날 그 거울 속 얼굴에서 느닷없는 발견 하나를 하게 되었다. 만화에서 봤던 그 쭈글쭈글한 ‘할머니 입’의 조짐이었다. 거울 속 그 얼굴과 그 입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는데 그때 불시에 찾아든 생각은? 내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사실 이는 벌써 10여 년 전 갑자기 시력이 안 좋아질 때 가졌던 생각이다. 목사다 보니 글을 늘 가까이해야 한다. 남에 의해 작성된 글을 읽기도 하지만 스스로 작성한 글을 발표해야 되는 자가 목사다. 어느 날 원고를 들고 설교단에 섰는데 아, 이게 무슨 낭패람? 갑자기 설교원고가 희미해지는 것이다. 그날 노안은 나를 습격하고야 말았다. 그날이 ‘이런 날’의 첫날이었다.
그런데 지금 노안은 아무 것도 아니다. 노화의 증상은 이제 눈을 벗어나 내 몸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장악의 속도 역시 매우 빠르다. 가장 짜증나는 증상은 자고 일어나면 한두 개씩 빠지는 속눈썹이다. 실제적으로 이게 불편한 게 빠진 눈썹이 내 눈동자 안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머리카락 빠지는 거야 진즉 포기했지만 속눈썹까지 사라지고 있으니(속눈썹은 다시 난다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속이 많이 상한다.
더 있다. 살도 갈수록 말랑말랑해진다. 근육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어렸을 때 할머니와 한 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난 그 말랑한 살 만지는 기분이 무엇인 줄 안다. 그때 난 할머니 살갗을 만지며 할머니 살은 왜 내 것과 다르지?, 하며 궁금해 했다. 그런데 지금 내 살이 할머니의 그것처럼 축 쳐져 힘이 없다. 누가 그랬다. 그 사람 나이를 알려면 그 사람의 목을 보라고. 내 목에도 이젠 가로주름만이 아니라 세로주름까지 완벽하게 잡혀있다.
이런 건 다 신체적 외모의 징후들이다. 활동의 영역에서도 달라져가고 있다. 물건 집는 데 힘들다. 아침에 양말 신을 때도 끙끙거린다. 힘들어서 힘든 것도 있지만 괜히 서두르다가 허리 나갈까봐 그렇다. 언젠가 내 위로 다섯 살 더 많은 한 분이 허리가 삐끗해 고생하시는 걸 보고 어쩌다 그랬느냐 물었더니, 목사님 저 재채기하다가 이리 됐어요, 하는 말을 듣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그리고 여기저기 자꾸 잘 부딪히고 다닌다. 가구 모서리에 발등을, 방문 지나다 팔꿈치를, 심지어 일어서다가 정수리를 쿵쿵 찐다. 이게 도대체 뭐람!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젊을 때보다 지금 운동을 훨씬 더 열심히 한다는 사실이다. 조금 더 일찍부터 시작할 걸 하는 후회가 있다. 물론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자위와 함께 매일 꾸준하게 하려 하니 그나마 스스로 기특할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느낀다. 지금의 나의 운동은 ‘증진’보다는, 잘하면 ‘유지’요 심하면 ‘생존’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내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근데 이미 왔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할까? 그래서 이 글의 목적은 ‘푸념’이 아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독자들의 공감을 얻으며 서로 위로하자는 뜻에서도 아니다. ‘받아들임’ 때문이다. 난 설교하면서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신앙은 일종의 받아들임입니다. 잘 받아들이는 자가 예수 잘 믿고, 잘 받아들이는 자가 신앙이 좋습니다.”
무엇이든 그렇다. 이미 있는 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면 있는 그것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다. 특히 그게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상황이면 더더욱 그렇다. 노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노화는 인생의 자연스러운 현상의 일부에 속한다. 오지 말라고 해도 오는 게 노화다. 그래서 일단 이를 잘 받아들이라. 그래야 잘 관리되고 잘 극복된다. 내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결국 왔으니 어쩌랴. 이제 받아들이라. 받아들이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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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