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뭐길래? 축구란 공 하나를 놓고 스물두명의 사람들이 머리와 발로 노는 것인데, 이 단순한 일에 온 세계가 한곳에 모여 이 난리를 펴니 이 사태를 어찌 이해해야 할지 모를 노릇이다. 우리나라도 그 중 하나다. 2002년의 4강 신화의 추억만 없었어도 이보단 덜하련만, 이젠 모든 성적의 기준을 거기다 맞추며 온 국민이 성화를 부리니 선수들로서는 여간 부담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게 다 끝났다. 16강 문턱에서 좌절되었다. 세계 1위 독일을 이긴 것으로, 그것도 2점차 무실점으로 승리한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우리나라 없는 월드컵을 시청해야 하니,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은 사라져 좋으나 흥미는 반감된 상태다. 월드컵으로 인한 신나는 일 경험은 4년 뒤로 또 한 번 더 미뤄야 할 판이다.
2002년 4강 신화 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에 이토록 신나는 일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번을 포함해 그 뒤로 네 번이나 더 있었던 월드컵에서 그런 일은, 아니 그 비슷한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때의 그 신명남은 글자 그대로 ‘신화’로만 남아야 할 듯싶다. 이로 인해 잠정적으로 내린 인생 결론은 이것이다. 내 인생 앞에 신나는 일은 날 위해 늘 대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사실 우리의 인생은 대체로 무료함과 평범함 속에 놓여있다. 반복되는 일상에, 진보 대신 퇴보에(늙어간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이런 게 우리의 하루하루다. 미국 오면 다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더 진부한 게 이곳의 삶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가 그런다. “인생이 그리 재미없니? 그럼 사고 한 번 터지게 해줄까? 고마운 줄 알아야지 이 친구야!” 맞는 말이다. 근데 이것도 아니다. 사고만 터지는 인생 좋아할 사람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미없이 진부한 것도 싫고, 매일 사고치는 인생도 싫다. 이기적으로 들리겠지만, 아무튼 인생이 좀 신나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한 내 인생이 무조건 싫은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신나고 좋은 일만 일어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가 우리 각자의 절대적 인생소원이라지만, 내가 신나면 다른 누군가가 깊은 좌절의 늪에 빠지는 게 바로 이 세상사다. 그 좋은 예가 이번 월드컵 마지막 경기다. 우리의 승리는 독일의 절망적 패배를 담보로 해 얻어진 거였다. 독일도 이 패배로 온 나라가 비통에 빠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희열은 누군가의 비탄을 제물 삼아 주어진다.
C. S. 루이스의 <스쿠르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가 관찰한 인간 모습의 일부다. “네가 환자(인간)를 자세히 관찰했다면, 그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에 이러한 기복이 있다는 걸 알아챘을 게다. 일에 갖는 흥미도, 친구들을 향한 애정도, 몸의 욕구도 죄다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든?” 그러니까 ‘기복’이란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현상의 일부로서 인간의 ‘객관적인 형편’보다는 ‘주관적 태도’에 더 연루되어 있다. 그렇다면 설사 신나는 일이 내 인생 앞에 저절로 굴러들어온다 해도 내가 그걸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신나는 일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만약 생긴다면 아주 가끔이다. 월드컵 4강 신화처럼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예외가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복음이다. 복음 안에는 영원성, 절대성, 불변성이 다 담겨있다. 내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히, 절대적으로, 불변하게 신나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은 이 세상 역사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이 엄연한 진리가 오늘도 내일도 매일 나를 신나게 해준다. 이 세상에 유일하게 신나는 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함께하는 삶이다. 결론이 좀 이상한 방향으로 났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 유일하고 꾸준하게 신나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뿐이다. 이것이 곧 내가 신자 된 이유이며 목사 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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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