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칼럼] 데이빗 구달(David Gudal) 의 죽음
2018-06-21 (목)
김문철 목사/천성교회 담임
데이빗 구달은 호주의 생태학 과학자였다. 그는 90세 까지 테니스를 즐겼고 102세에 논문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해왔다. 그런데 그가 지난 5월 10일 고국 호주를 떠나 스위스 바젤로 가서 104 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가 선택한 죽음은 특별했다. 한 기관의 도움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으며 치사량의 약물 투여로 편안하게 죽어가는 방식이었다. 방식은 안락사이지만 사람들은 존엄사라 불렀다.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불치병 말기 환자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 환자에게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하는 의료행위다. “어차피 얼마 살지 못할 인생 고통이나 받지 않고 죽자(죽게 하자)”는 의도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능동적으로 죽음을 허용했다는 차원에서는 살인(자살) 행위로 볼 수 있다.
존엄사는 안락사와는 조금 다르다. 이는 치료 불능의 환자 (뇌사 혹은 그와 유사한 질병) 가 스스로의 힘이 아닌 오직 연명장치(인공호흡 및 영양분 공급 등)에 의해 살아갈 경우 그 장치를 끊어 버림으로 자연사 하게 만드는 의료행위다. “연명장치로만 숨을 쉴 뿐 인간적 삶이라고 볼 수 없으니 자연적으로 죽게 하자” 는 의도가 좋아 보일 수 있지만 여전히 연명을 능동적으로 차단했다는 차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구달의 죽음은 안락사나 존엄사와는 또 다르다. 왜냐하면 구달은 치명적 질환이나 극심한 통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다 건강이 나빠지면 불행할 것 같다. 진짜 슬픈 것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이다” 라는 이유로 죽음을 선택했기때문이다. 스위스는 구달과 같은 이유로 죽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약물투여로 편안하게 죽도록 돕는 기관들이 많고 법적으로도 허용한다. 그리고 품위롭게 죽는다 해서 품위사라고 부른다. 하지만 건강한 상태에서 선택한 죽음이라는 차원에서 자살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좀더 엄밀히 말하면 특정 기관이 도왔다는 차원에서 조력자살이다.
오래 전 병원에서 원목으로 근무할 때다. 교통사고로 뇌를 심하게 다친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왔다. 병원 의료진은 최선을 다해 치료했지만 환자는 이미 반응이 없었다. 의사는 뇌사판정을 내렸다. 중환자실에서 무의식, 무반응 상태로 연명장치에 의한 심장박동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병원은 뇌사인 경우 가족에게 연명장치를 유지할 지 뗄 지에 대한 결정권을 주었다.
결정을 위해 다양한 대화들이 오고 갔다: “그래도 호흡장치때문에 아버지(환자) 심장이 뛰고 있다. 이대로 끝까지 가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무의식 무반응의 회복불능 상태 아닌가? 살아 계신다 볼 수 있을까?” “앞으로 엄청난 의료 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오고 갈 때 “그래도 생명은 무조건 살려야 돼” 라고 말하기가 쉬울까? 물론 나는 가족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단지 오랜 가족회의 끝에 호흡장치를 끊기로 한 그들의 결정을 존중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치명적 환자라도 그 죽음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위에 언급된 죽음들은 앞으로도 계속 논쟁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달의 죽음을 품위사로 미화하기에는 그 이유가 궁색해 보인다. 고독, 불편함, 그리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택한 죽음의 방식이 품위로워 보일지는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생명경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력자살 방식을 개발하기 보다는 그런 죽음을 결정하게 만드는 이유들을 해결하려는 것이 더 품위 있고 인간답지 않을까?
우리의 생명이 내게 속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고전 3:23) 의식이 있는 한 내 생명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지 않을까? 데이빗 구달의 죽음이 앞으로 죽음에 대한 경계선을 약화시켜 생명을 내 뜻대로 너무 쉽게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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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철 목사/천성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