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위기의 젤렌스키…이틀째 반정부 시위·EU “가입 문제” 압박

2025-07-23 (수) 01:14:04
크게 작게

▶ 젤렌스키 “여론 듣는다, 공동 행동계획 내겠다” 국내외 달래기

▶ 전국 각지서 시위 “치명적 실수”… “독립성 보장 명확한 입법 필요”

위기의 젤렌스키…이틀째 반정부 시위·EU “가입 문제” 압박

23일 르비우에서 벌어지는 시위[로이터]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반부패 기관 단속을 강화한 데 대한 국내외에서 반발로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3일(현지시간) 이틀째 이번 사태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 침공을 막기 위한 전쟁에서 최대 후원자인 유럽연합(EU)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며 경고음을 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22일 검찰총장이 독립 기관인 국가반부패국(NABU)과 부패 사건 기소를 담당하는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을 대상으로 더 많은 감독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안에 서명했다.


수사·안보 당국은 그에 앞서 NABU를 약 70차례 수색하는 등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고 직원 1명을 러시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우크라이나 시민사회는 정부 고위급의 부패 혐의에 대한 반부패 기관의 적극적 수사를 막기 위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들 기관에 대해 고삐를 죄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NABU와 SAPO는 친러시아 성향 야누코비치 정권의 부정부패에 반발해 일어난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만들어진 반부패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반발은 특히 거셌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시에 국가기관의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군사정보국(HUR)은 23일 성명을 내 러시아가 이번 사태에 따른 여론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서방 지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크라이나 주재 주요 7개국(G7) 대사들은 21일 NABU 수사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한다"는 성명을 냈고, EU는 반부패 기관 감독 법안의 의회 통과 전후로 연속해서 경고음을 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23일 젤렌스키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설명을 요구했다.

EU 대변인은 "법치주의 존중, 부패와의 싸움은 EU의 핵심 요소"라며 "가입 후보국으로서 우크라이나는 이같은 기준의 충족이 기대된다. 이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법치주의 유지와 반부패 노력을 충분히 보이지 않으면 EU 가입과 더불어 국제 공여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은 지적했다.

우크라이나의 신임 총리 율리아 스비리덴코는 인터뷰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재정 지원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는데, EU나 IMF 같은 국제 공여 기관은 자금의 이동에 법치주의를 기본 기준으로 삼는다.

국내외 거센 압박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수습에 나섰다. 그는 23일 이번 사태의 중심에 있는 NABU, SAPO, 검찰청, 보안국(SBU), 국가수사국(SBI), 내무부 수장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의견을 들었다.

그는 이후 엑스(X·옛 트위터)에 "우리는 사회가 하는 말을 듣고 국가기관에 원하는 바를 보며 정의와 각 기관 기능을 보장한다"며 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주 안에 공동 행동 계획이 마련될 것"이라며 "우크라이나를 강화하고, 기존 문제를 해결하며, 더 큰 정의를 구현하고, 우크라이나 사회의 이익을 진정으로 보호할 조치를 담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저녁 연설에서는 "의회에 새로운 법안을 제출하겠다"며 "반부패 기관의 독립성을 위한 모든 기준이 마련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다만, 이 법안이 기존 법을 대체하는 것인지, 무슨 내용인지 등 상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여론이 금세 수그러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반부패 기관 단속으로 이번 사태가 확산하기는 했으나, 그동안 전시 혼란기를 틈 타 정권에 권력이 집중되고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국민이 10년 넘게 바라온 고위층 부정부패 근절이 이뤄지지 않는 데 대한 우려가 지속해서 쌓여왔기 때문이다.

NABU와 SAPO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만난 이후 낸 입장에서 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비판을 유지하며 "의회가 없앤 (독립성) 보장을 복구하려면 모호한 부분이 없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2일 우크라이나에서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에서 시민들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다", "부패는 죽음"이라고 적은 팻말을 들었다.

23일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AFP·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수도 키이우에 수천 명이 모여 반부패 기관 감독법에 항의하는 시위를 이어갔고 르비우, 하르키우, 오데사 등지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시위에는 10∼20대 젊은이들이 다수 참여했다.

키이우에는 시위 참가자가 점점 늘어 전날의 약 3배인 1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유로마이단 이후 최대 규모라고 키이우 포스트는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을 머리에 뿔을 달고 귀를 막은 모습으로 그려넣고 "당신은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고 쓴 팻말도 눈에 띄었다.

키이우 인디펜던트는 러시아와 싸우고 있는 장병들도 이번 사태에 분노와 허탈감을 표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설계자'라는 콜사인을 쓰는 23세의 한 드론 조종사는 "정부가 2019년 이후로 봤던 진짜 얼굴을 이번에 드러낸 것 같다"며 "전쟁으로 인해 우리가 집중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토로했다.

우크라이나 국가방위군 지휘관인 페트로 쿠지크는 이번 일을 "당국의 치명적 실수"라고 부르면서 "정부 고위급이 얽힌 많은 부패 스캔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국민에게서 훔친 자산을 합법화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