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틴 루터 ‘성경이 나에게 이르는대로 할뿐이다’
▶ ‘종교 개혁자 믿음 본받아 복음 전도자로 사용’기도
성지순례 나선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 교우들 옥스퍼드대학서 기념촬영 .왼쪽부터 정은해 최수지 계해령 김은영 정문섭 최선붕 송계영목사.
연합감리교회 캘리포니아 네바다(California-Nevada)연회 한인코커스 유럽 종교개혁지 순례는 마틴 루터(1483~1546)의 제국회의의 장소였던 보름스를 향했다. 성페터돔 옆 주교궁 터의 제국회의에서 루터가 심문 받던 자리에 서 보았다.
의회의 입장 취소를 거부하며 루터는 이렇게 증언하였다고 한다. “나는 잘못되고 모순된 교황과 공회를 전적으로 믿지 않으며 또한 성경말씀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볼 때 나의 견해를 부인할 수 없고, 다만 성경이 나에게 이르는 대로 할 뿐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 안에서와 나의 신앙적인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취소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양심을 거슬러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며 주의 축복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보름스국제의회 루터가 서있던 곳 신발 조형물
당시 루터는 38살이었다. 그리고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 시켰던 프레드리히 선제후(Friedrich der Weise)의 나이는 고작 21세였다. 젊음의 열정과 시대를 보는 시각이 세계를 바꾼 것이다. 청문회 장소에서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루터광장에 루터의 동상과 함께 주변에는 네 명의 종교개혁가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루터가 세상에 눈을 뜨게 한 도시 아이제나흐를 방문 하였다. 루터가 15세 때에 고향 아이스레벤에서 부모를 떠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이곳 아이제나흐에서 성 게오르그(St. Georg)학교를 다녔다. 당시 코타 여사 집에 머물던 루터는 당시의 풍습대로 함께 머물던 학생들과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합창을 하여 받은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우리가 방문하던 날은 마침 주일아침이어서 루터가 당시 다녔던 성 게오르겐 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하였다. 루터가 학생 때 성가대원으로 출석하고 또한 그곳 출신인 음악의 아버지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세례를 받은 교회이며 바흐가 평생 지휘자로 섬겼던 교회인 성 게오르겐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역사적인 교회에서 그리고 예배 중에 성찬예식에도 참여하여 잊을 수 없는 감격에 젖어보았다.
성 게오로그교회 주일 낮 성찬식 참석. 왼쪽두번째부터 계혜령,최정희
우리는 곧 루터를 보호했던 바르트부르크 성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루터는 융거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1521년부터 2년 동안 저술에 정진하여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독일어로 11주 만에 신약성서를 번역하였다고 한다.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던 아담한 방에서 벽속에서 기이한 소리를 듣기도 했으며, 자신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속삭임에 잉크병을 던졌다는 이야기도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로인해 19세기까지 이 방에는 잉크자국을 새로 칠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마귀의 모형으로 대신하였다. 루터는 평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민가로 내려와 그들의 언어를 익혔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도 이곳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루터의 도시이자 그의 정신적 고향 에르푸르트로 향했다. 아버지의 세속적인 출세를 원하는 간곡한 권유로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공부를 시작하였던 그는 수도승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루터가 24세 되던해에 에르푸르트이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고 첫 번째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 후 아우구스트 수도원으로 향했다. 루터는 이곳에서 비텐베르크의 신학교 교수로 부임하기까지 약 6년동안 수도사로 있었다. 루터가 학문과 사제가 된 정신적 고향을 떠나 루터 탄생지이며 생을 마감한 임종한 루터의 생가가 있는 그의 고향 아이스레벤을 향했다. 루터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태어난 다음날 1483년 11월 11일 세례 받던 날이 성 마틴을 기념하는 날이라 루터는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드디어 종교개혁의 역사적 현장인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비텐베르크에 도착하였다. 비텐베르크에 있는 루터 하우스는 루터가 약 35년 동안 중점적으로 활동하던 곳이다. 이 집에서 루터는 1508년부터 수도사로 살았고, 1525년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남편과 아버지로서 살았다. 루터가 가르치던 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루터의 몸에서 나온 담석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25센트(Quarter) 동전 크기만한 담석이 5-6개가 보존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아픈 몸을 이끌고 종교개혁을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에 진한 감동이 다가 왔다. 성 마리아교회는 비텐베르크 시청 광장 옆에 위치해 있는 평민교회였다.
마틴 루터가 95개의 종교 개혁 논제를 정문에 붙인 비덴베르크 성곽 예배당.
루터는 31세에 비텐베르크 교구사제로 파송 받아 시교회(St. Marienkirche)에서 설교를 담당하였다. 루터의 자녀들이 이곳에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비텐베르크 성곽예배당은 당시 귀족들의 교회였다. 95개조의 논제를 붙인 정문에 도달하였다. 교회의 탑 둘레에는 “Ein feste Burg ist unser Gott, ein gute Wehr und Waffen”(내 하나님은 강한 성, 좋은 방패와 병기가 되신다)는 글을 크게 새겨놓았다.
루터는 이 교회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동료 교수이자 종교개혁의 운동을 함께해 온 멜란히톤과 함께 이곳에 묻혔다. 우리 일행은 루터보다 100년 앞선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얀 후스(1372~1415)를 만나기 위해 체코의프라하 성 안의 그의 동상으로 향했다. 본래 그의 모습이 아니라 화형당한 모습을 조각해 놓은 것이라고 흉물스럽게 생겼다. 이 동상의 단에는 체코어로 “서로를 사랑하라. 모든 이들 앞에서 진실을 부정하지 마라”는말이 적혀 있다. 얀 후스의 이름 후스는 거위를 뜻하는 구스와 비슷한 발음이라 체코 사람들은 후스를 거위라고 조롱하였기 때문에 얀 후스는 다시 태어나면 백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화형당하기 전에 이 말을 남겼다. “만약 당신들이 지금 거위를 불태운다면 백년 후에 당신들이 해칠 수도 구울 수도 없는 백조가 나올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1세기 후에 루터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아이슬레벤의 루터 생가에는 백조의 모형이 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스위스 종교개혁가로 츠빙글리(1484~1531)가 세상을 떠나기 전 12 년 동안 이곳에서 설교하였던 취리히의 로스뮌스터 교회와 바젤을 거쳐 파리로 돌아와 마지막 폐회예배를 드리며 성만찬을 나누었다.
이 순례의 여정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제 새로운 부흥을 향하여 “종교개혁자들의 분명한 믿음과 용기를 본받아 부흥의 복음전도자로 사용하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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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영목사/ 상항 한국인 연합감리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