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리교운동의 출발지 영국과 루터의 종교 개혁지 탐방.
▶ 존 웨슬리 ‘세계는 나의 교구다’. 53년간 복음 증거 사역
유럽 종교개혁지 순례여행에 나선 순례자 일동이 영국 웨슬리 체플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른쪽 앞줄 첫번째 송계영 목사.뒷줄 첫번째 박상일 목사. [사진 김현일 목사]
연합감리교회(UMC) 캘리포니아 네바다 연회 한인목회자 8명과 30명의 성도들이 유럽 종교개혁지 순례를 지난 4월 16일(월)부터 27일(금)까지 12일간 다녀왔다. 유럽 6개국(프랑스, 영국, 벨기에, 독일, 체코, 스위스)의 13개 도시 30개 종교개혁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2회에 걸쳐 연재할 성지순례기는 한인 코커스 회장인 송계영 목사가 썼으며 , 사진은 김현일 목사가 찍었다.
이번 유럽 종교 개혁지 순례 여행은 크게 두 유적지를 중심으로 돌아보았다. 하나는 감리교 운동의 출발지 영국이며 다른 하나는 루터의 종교개혁지 순례이다. 우리는 존 웨슬리의 유적을 시작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지 순례여정을 택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츠빙글리와 얀 후스 유적지를 보았다.
성지순례에 나선 목회자 올더스케이트 조형물 앞 기념 촬영. 왼쪽부터 강가람(강해성목사 아들) 강해성 정현섭 김옥연 송계영 박상일 권혁인 김현일 목사.
먼저 존 웨슬리(1703~1791)의 유적지 영국을 향하였다. 웨슬리 유적지 순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는 세 곳이다. 옥스퍼드 대학, 브리스톨, 그리고 런던이다. 우리 일행은 4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파리에 도착하여 영국을 향해 가는 도중에 파리의 반 종교개혁의 역사 위그노 학살지 탐방으로 여정을 시작하였다. 위그노 대학살의 시초가 되었던 곳은 생 제르맹 록세루아 교회였다. 교회의 종소리가 대학살의 신호탄처럼 울리기 시작해서 아픔의 현장으로 유명해졌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본의 교회 학살 현장인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가 고향이라 특별히 이들의 희생이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추모하며 뜨거운 기도를 드린 후 순례의 여정을 비장한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다음날 프랑스 칼라이스에서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런던에서 서쪽 감리교회의 탄생지인 브리스톨로 향하였다. 가장 오래된 감리교 예배당 뉴룸(The new room)을 향했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고 야외설교를 시작한지 한 달 만에 땅을 마련하고 예배당을 지어 1739년 6월 3일 첫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최초의 감리교 예배당으로 불리는 뉴룸이다.
감리교 출발의 현장에서 존 웨슬리 목사님의 열정적 목회와 속회조직의 출발 과정을 보았다. 감리교회의 특징이 된 존 웨슬리의 야외 설교장 핸햄 언덕(Hanham Mount)을 향했다. 엄격하고 전통적인 성공회 예배 환경에서 성장하여 사제가 된 웨슬리에게 옥외 설교는 낯설고 어색했지만 옥외 설교가 성경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존 웨슬리가 체험한 동일하신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통회하는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적 소용돌이에서 18세기 영국 사회는 물론 세계의 기독교 역사를 바꾼 웨슬리의 감리교 부흥운동은 새로
운 희망 대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옥스퍼드대학 채플 강대상 아래 웨슬리 표시
우리는 감리교 운동이 잉태되었던 Holy Club이 시작되었던 옥스퍼드 대학을 향하였다. 옥스퍼드에서가장 큰 단과대학은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이다. 영화 ‘해리포터’의 촬영 장소로 알려진 곳이다. 이 대학 중앙의 잔디밭(탐 쿼드)은 헤리포터에서 빗자루 타고 하늘을 날며 운동을 하는 장면이 촬영되었던 장소로 그 모습이 눈에 펼쳐졌다. 크라이스트처치 대학의 다이닝 룸(The Great Hall)은 대학생활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학생들은 이곳에서 매일 저녁식사를 같이 하면서 모였고 특별한 경우에는 이 식당에서 국가 만찬 행사를 한다고 한다. 식당의 벽면에는 영국을 이끌어온 이 학교 출신의 13명의 내무장관을 포함한 많은 이 학교 출신 지도자들의 초상화가 가득 전시되어 있다. 들어가는 입구 왼쪽 뒤쪽에 존 웨슬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우리는 크라이스트처치 대학 성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내가 다녔던 감리교 신학대학교 웰치 예배당에 비하면 어마어한 규모이다. 이곳에서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이 다가 왔다. 성전 설교단 아래의 바닥에는 대리석으로 문구가 새겨져 있다.
햄핸 언덕에 있는 존 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다’문구
마름모꼴의 대리석 한 조각에 위에 John Wesley(1703-1791)과 아래 Charles Wesley(1707-1788)이라는 문구 사이에 웨슬리가 안수 받았음을 나타내 주는 문구로 “Students of Christ Church Leaders of theMethodist Revival Ordained in this Cathedral”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감리교 목사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옥스퍼드에서 웨슬리가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이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라면, 링컨칼리지는 존 웨슬리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더 깊은 학문적 연구와 성숙한 신앙으로 몰입해 들어갔던 곳이다. 링컨 칼리지에서 웨슬리는 교수로 임명되었다.
링컨대학에 들러 Holy Club이 모였던 장소 및 웨슬리 흉상이 설치된 창문을 보고 감회를 새롭게 하였다. 우리는 감리교 운동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지도하에 지어진 웨슬리 채플과 ‘웨슬리의 집’으로 향했다. 영국 여성 수상 대처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기념으로 제단을 기증하였고 대리석 기둥 일부는 찰스 왕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감리교 운동이 신앙운동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개혁운동으로 지어져 영국 사
회를 살렸기 때문이다. 1791년 3월 2일 웨슬리가 2층 침실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11년간 웨슬리의 집으로사용되었던 웨슬리 생가를 방문하였다. 생가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소는 2층에 있는 웨슬리 개인 생활공간이다.
서재에서 많은 편지들을 썼을 것이며 휴식을 취했던 침실이 있었다. 웨슬리는 이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침실 옆의 집이 건축된 후에 존 웨슬리에 의해 추가로 지어진 작은 방, 성경을 읽고 기도하던 방이 있다.
존 웨슬리 기도실에서 송계영 목사 기도
잠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복음의 사람이 될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짐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감리교 운동의 출발점이 된 존 웨슬리가 회심 장소 올더스게이트 거리를 방문하였다. 어찌보면 교회의 역사는 회심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감리교회가 존 웨슬리의 1738년 5월 24일 이곳에서 뜨거운 회심으로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회심 사건 이후 1791년 3월 2일 웨슬리가 죽을 때까지 53년 동안 웨슬리는 영국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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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영 목사/ 상항 한국인 연합감리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