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유'라 현판을 달고, 새 공양간을 마련한 김에, 올 한해, 영화사에 오는 누구든, 밥을 해주기로 하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렇지만, 실은 절에는 공양주가 있어야 한다,에 걸려, 신도에게 밥 좀 해달라, 공양주 좀 살아달라,고, 통사정, 맘고생, 몇 년 만에, "마음의 점을 바깥에 두면 밥이 되지만 안으로 돌리면 법이 되고, 나만 생각하면 밥이 되지만 돌려 너에게 돌리면 법이 된다."는 옛스님 법문이 느닷없이 떠올라서다.
밖에서 밥을 구하지 말고 법을 내주자, 그렇게 됐다. 때마침 새 공양간이 완성된 것이다. 현판을 '소요유'라 건 것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 단어에 매료되어 공부 한창때 지대방 창호문에 써넣고 보곤 했는데, 어느 햇빛 밝은 날, 문 밖으로 비친 그 글자는 완전 뒤집혀 보였다.
전도몽상! 소요유! 그 순간, 자유를 찾았다. 그런 사연이 있는 '소요유'에서 밥 대신 법을 하기로 맘을 뒤집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싶다. 부처님 인연법은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저 오는 건 없다. 내가 지은 바 대로 온다. 그리하여 요즘, 오는 이들에게 점심을 열심히 내고 있다.
점,심,에 얽힌 유명한 덕산스님 일화가 있다. 당시 금강경으로 명망 높던 스님이라, 상이 좀 있었던 걸까, 그걸 고치자고 관세음보살 화현같은 밥집 노파가 그 앞에 나타난다. 금강경 지고 절 내려가던 길에 잠시 요기하러 국밥집에 들렀는데, 점심 달라는 스님 청에, 금강경에 보면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불가득이요, 미래심도 불가득이라 했는데, 스님은 어느 마음에 점을 찍으시려오, 국밥집 노파 묻는다.
금강경 달달 외던 스님이 말문이 막혀 공부 다시 들어갔다는 얘기다. 그 마음의 점,에서 유래한 것이 점심,이다. 점심이란 점찍듯 간단히 먹는다는 불가에서 유래했다. 그 전엔 조석끼니,라고 해서, 점심이 없었다 한다. 애니웨이 사람들에게 점심을 해주기로 한 게, 점을 안으로 찍기로 하여 비롯되었으니, 이 또한 부처님의 절묘한 뜻이지 싶다.
밥을 밖에서 구하려면 직장가야 하고 시비해야 하고 경쟁자 쳐내야 하고 투쟁에, 상처에... 고달프기 그지 없다. 그럼 법은 어떨까. 구법승들 역시 고달프기로 치면 밥 구하는 이보다 더하다.
그중 압권은 인도로 부처님 경전 구하러 갔던 혜초스님 같은 분들이 있다. 고생, 고생, 그 구법 기록은 눈물겨워 못 본다. 밥 구하는 인생과 법 구하는 인생 중 어떤 게 더한가는 모르지만, 밥이든 법이든 밖에서 구하는 것은 안에서 구하는 것보다 심신이 더 고달프단 것만은 확실히 안다. 그래서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구하기로 맘을 돌린 것이다. 점 하나로 행복을 얻었다. 확실히, 얻어먹으려고 하던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타.
이곳에서 신도밥 얻어먹으려면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다. 부정한 음식은 선신을 쫓는다,는 엄연한 가르침이 있기에, 누구나, 아무렇게나, 하게 둘 수도 없고, 복되게 만들려니, 하게는 해야 하고, 절법을 잘 모르니 입대야 하고, 입대면 성내고, 처처에 애가 탄다.
그런거 저런거 짠한거 불편한거 맘에 안드는거... 안으로 뒤집으니 한꺼번에 날아갔다. 이 쉬운 걸, 공양주 하나 만들어보겠다고, 그 오래, 마음 노동을! 이렇듯, 한 마음 돌리는 일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데, 손등에 착이 있거나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음, 그 쉬운게 도 닦는 이도 잘 안된다. 법회 보랴, 일하랴, 제때, 제대로 밥되게 하는 거 쉽지 않다.
하지만, 남한테서 밥 구하는 거에 비하면 고요하기가 하늘 땅 차이다. 기쁘다. 대신 밥이 법이 되었으므로 영화사 일요법회는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었다. 다 좋은 것도 없고 다 나쁜 것도 없는 세상, 몸 편한 거 보다 그저 맘 편한 게 최고다. 바로 소요유의 실천이다. 이런저런 시비 다 떠나, 대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 소요유다. 오늘 그대들의 점,심은 어디인가? 밖인가, 안인가? 너에게인가, 나에게인가? '소요유'에다 찍어보심은 어떠실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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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스님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