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사람들은 해 떠오르는 쪽으로/ 중들은 해지는 쪽으로/ 죽자 사자 걸어만 간다/ 한 걸음/ 안 되는 한 뉘/ 가도 가도 제자리/ 걸음인데” (‘제자리걸음’)
“삶의 즐거움을 모르는 놈이/ 죽음의 즐거움을 알겠느냐/ 어차피 한 마리/ 기는 벌레가 아니더냐/ 이 다음 숲에서 사는/ 새의 먹이로 가야겠다” (‘적멸을 위하여’)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아득한 성자’)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설악산 신흥사 조실인 무산 스님 시조에 깨달음을 입힌 승려시인으로 통한다. 속명(조오현)으로 발표된 그의 선시조는 한국은 물론 미국 등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인터넷언론 프레시안은 재작년에 그에게 ‘가장 승려답지 않으면서 가장 승려다운 시인’이란 수식어를 붙이며 그의 시조세계를 조명하는 연재물을 실었다. 올해 2월에는 중앙대에서 그의 시조를 연구한 논문으로 문학박사가 탄생하기도 했다.
한국 고유의 시조에 깨달음을 입힌 선(禪)시조의 선구자로 불리는 무산 스님이 북가주에서 깨달음과 시조에 대해 지론을 공유한 적도 있다. 2015년 3월 UC버클리 한국학센터에서 열린 ‘무산 조오현 그리고 영혼의 울림’ 심포지엄에서다. 당시 그는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다.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라는 주체가 있으므로 해서 인식되고 존재하니 언제나 깨달아야 할 것은 남이 아니고 나 자신”이라며 올바른 깨달음에 대해 언급한 뒤 “일본은 일찍부터 하이쿠(전통시)를 미국에 보급했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면서 “한국인의 정신이자 맥박인 시조를 보급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본보 2015년 3월 22일자 참조).
일제하인 1932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성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이 산 저 산 떠돌며 정진하다 1989년 속초 낙산사에서 오도송(悟道頌) ‘파도’를 지었다. “밤늦도록 책을 읽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먼 바다 울음소리를 홀로 듣노라면/ 천경(千經) 그 만론(萬論)이 모두 바람에 이는 파도란다”
그의 법어도 수시로 화제가 됐다. 2012년 신흥사 동안거 해제법어는 그중 하나다. “나는 여든까지 살았지만 아직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잘 모른다. 그것을 알기 위해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수행하고 안거하는 것 아니냐. 콧구멍만 한 방에 들어앉아서 구멍으로 들어오는 밥을 먹으며 3개월 동안 징역살이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매년 무문관 수행 등 치열한 정진 속에서도 그는 1998년 만해사상실천선양회 설립과 만해대상/만해축전 시작, 1999년 성준장학재단 설립, 1999년 불교평론 창간, 2001년 ‘유심’(만행 한용운의 창간했던 잡지) 복간, 2002년 춘천불교방송 개국, 2003년 만해마을 조성 등에도 앞장섰다.
무산 스님이 26일 입적했다. 세수 87세, 승납 60세.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미북 정상회담 등 문제로 바쁜 와중에도 스님의 떠남을 아쉬워하는 글을 SNS에 올리는 등 각계의 조문과 애도가 잇따르고 있다. 스님이 남긴 열반송 또한 언뜻 웃음을 짓게 하다 아연 웃음이 싹 가시게 한다.
“천방지축(天方地軸) 기고만장(氣高萬丈)/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살다보니/ 온 몸에 털이 나고/ 이마에 뿔이 돋는구나/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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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