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총기난사, 로얄웨딩 그리고 화산 분출

2018-05-22 (화) 노 려/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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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의 눈

지난 주말, 오랜 만에 트럼프, 스토미 데니얼을 빗겨간 뉴스들을 접했지만 역시 마음은 무거웠다.

아무래도 첫째 뉴스는 신데렐라 보다 더 신데렐라가 된 메간 마켈 스토리이다. 그러나 로얄 웨딩이 온 미디어를 뒤덮기 바로 직전에 교내 총기 학살사건에 보도되어 참담함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20년전의 콜롬바인 사건, 아이들을 아침에 학교 보냈는데 아이가 죽어서 돌아옴을 당한 부모의 심정을 도저히 헤아려볼 수가 없어 심장이 저렸었다. 그 후 교회나 나이트 클럽 또한 영화관에서나 콘서트 장에서의 총기난사 사건이 너무도 흔하게 들려오는 미국이다.

유치원 어린이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샌디 훅 사건에 경악했던 기억이 흐려지기도 전에 플로리다 하이스쿨 사고가 터졌고, 와플 하우스 사건에 곧 이어 터진 이번 텍사스 산타페 하이스쿨 사건에 절망적이었던 것은, 놀라움보다는 그저 “또야?” 하는 내 자신 때문이었다. 플로리다 학생들이 용감하게 목청이 터지게 총기규정을 외쳐대고 수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나와 목소리를 더 했지만, 대통령을 위시해 힘있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문화나 정신병을 탓하며 총기 규제법에 대해서는 꿈쩍도 않는 상황에 무력감에 빠져 버린 것 같다.


총기사건이 이제는 더 이상 사람을 놀라게 하는 끔찍한 뉴스가 아니어서였을까, 토요일 새벽부터 하루종일 모든 TV방송국들이 영국 황실 결혼식에 올인하는 걸 보았다. 미국인이면서 이혼녀이고 더구나 흑인의 피까지 섞인 메건 마클이 어린 흑인 여성들에게 ‘블랙 프린세스’의 희망을 줬다는 식으로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를 펼쳐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이제는 사회가 변하여 유색인종인 우리 아이들도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때와 비교해 본다. 오바마 정부 때 숨을 죽이던 백인들은 지금 참았던 분노를 터트리듯 심한 인종차별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로얄 웨딩에서 ‘사랑’을 강조한 흑인 신부의 설교가 낯설게 들릴 정도로,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버리고, 불쌍한 난민들을 동물취급하는데, 신사 나라 영국왕실이 가정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탐 보이 페미니스트인 메건 마켈을 어느 정도나 포용해줄 것인지, 큰 희망을 걸 기분이 아니다.

또 하나 내 마음을 잡은 뉴스는 하와이 화산 분출이다. 하와이에 집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서 밤하늘에 붉게 타오르는 화산과 흘러내리는 용암 장면을 초조히 지켜보았다. 아스팔트 도로를 덮치며 주차해 있던 차를 삼켜버리는 뜨거운 바위 물의 위력. 지구가 숨을 쉬느라 땅 속의 돌을 내뿜는 것이라고 했다. 태초부터 땅덩이와 바다가 뒤바뀌며 엄청난 변화를 겪어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주소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친구의 집은 화산의 반대편에 있어 큰 걱정은 없지만,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사회를 꿈꾸는 내 자신이 과연 우주에 떠도는 먼지와도 같은 이 지구상의 모래 한 알 만한 역할이라도 할수 있을런지 자신이 없다.

<노 려/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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