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경계는 없다(?)

2018-05-04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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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첼시의 갤러리를 기웃거릴 때가 있다. 전시작 중에는 ‘과연 이것이 작품인가?’ 하고 당혹스러울 때가 있는데 팽팽 돌아가는 미술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부터 미술은 관객을 작품에 끌어들였다. 작가가 관람객과 한번 안거나 악수 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비디오로 찍거나 관람객이 그린 그림과 글이 벽에 부착된 모니터에 등장하기도 했다. 작가가 온몸에 바디 페인팅을 하고 바닥에 깔린 캔버스 위를 구르는가 하면 손과 발, 심지어 자신의 은밀한 몸 한구석이 피사체가 되기도 한다. 1997년 모마 1층 특별전시장에서 한국작가 이불은 날 생선 등어리에 화려한 스팽글 꽃장식을 하여 썩어가는 냄새를 전시회에 끌어들였다. 소리와 음악이 함께 한 미술이 오감 미술이 된 지 오래다.

1999년 뉴욕 브루클린 미술관 ‘센세이션전’에서 크리스 오필리는 코끼리똥으로 장식된 흑인 성모마리아상을 전시했고 영국 채프먼 형제는 해골과 귀신들의 행진이라 할 잔혹한 작품들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데미언 허스트는 유리상자안 방부용액에 상어를 통째로 넣거나 젖소를 12조각으로 잘라 각각 방부액에 담궈 전시하는 등 기상천외한 전시로 우리를 번번이 놀라게 했다.


난해하고 복잡한 현대미술의 경계는 어디 일까? 얼마 전 일루전 아티스트 (illusion Artist) 윤다인의 인스타그램에서 희안한 작품들을 보았다. 그녀는 메이크업 도구와 수채화를 이용하여 눈과 입술, 얼굴 등을 제 몸에다 그린다. 자신의 실제 눈과 입술 옆에 눈 다섯, 입술 셋이 나란히 경쟁하듯 그려져 있어 실제 눈이 다섯, 입술이 셋으로 보인다. 얼굴이 뒤집혀 있기도 하고 얼굴 위에 다른 얼굴이 오버랩 되기도 하고 얼굴에 시계, 찻잔도 붙어있다. 손톱 장식에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머리카락까지 붙어있다.

윤다인의 인스타그램은 약 25만명의 팔로어가 있다. 2016년 10월19일 유명케이블쇼 엘런 쇼에서 그녀를 초대했고 전세계 유명 신문, 잡지가 모두 이를 소개했다. 일종의 눈속임인데 얼마나 정교한 지, 포스트 인터넷 예술시대의 수작업은 화려하고 발칙하다.
가끔 아이들이 그로테스크한 합성 사진을 메시지로 보낸다. 자신과 반려견 얼굴이 바뀐 사진이다. 얼굴 바꾸기 앱을 켠 다음 둘 이상의 얼굴이 나타나면 얼굴이 서로 바뀌는 영상이나 사진을 찍는다 한다. 짙은 눈화장에 머리에 화관을 쓴 사진, 토끼나 사자로 변신한 사진, 얼굴의 촛점을 흔들리게 하여 괴물처럼 만든 합성사진도 보내온다. 아이들은 킥 킥 웃으면서 이런 장난을 한다.

영화, 만화, 게임, 음악 모든 것을 스마트폰과 함께 하는 세대라 눈과 입술이 여러 개인 윤다인의 ‘괴물’ 작품도 재미있어 한다.

올해 아카데미상에서 작품·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물의 모양’에서는 온몸이 비늘로 덮인 수중괴물과 말 못하는 여자청소원이 신비한 사랑을 한다. 종이 다른 생명체와의 사랑을 통해 나와 다른 것을 수용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넓게 생각하면 이 시대에 우리를 편 가르는 이념, 인종차별, 성차별, 이런 것이 괴물이고 이것을 뛰어넘으라 한다.

미술의 장르도 그렇다. 설치, 회화, 사진, 판화, 드로잉, 필름/비디오 아트 모든 것이 오갈 수 있다. 한국화 뿐 아니라 선조로부터 내려온 서예, 자수, 모든 것은 현대미술화 될 수 있다. 전통과 현대를 섞어도 보고 이상과 현실을 버무려도 보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작가 혼자 작품하란 법 없으니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온 가족이 미술활동을 체험하기도 하고.....미술은 우리가 움직이는 모든 것에 등장하여 생활 속 미술이 될 것이다.

전통미술이 갤러리 안에 있다면 현대미술은 우리 집안에 있는 것, 그러고 보면 아날로그 세대인 내가 이게 작품이야? 할 것 없다. 내가 좋으면 좋은 것, 내가 즐거우면 즐거운 것, 미술의 경계는 없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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