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소설 같은 생(生). 어쩌면 기구한 생일 수도 있다. 원래 영화란 허구를 바탕으로 한다. 시나리오(각본) 자체가 허구니 그렇다. 간혹, 투르 스토리(true story)로 영화를 만드는 것도 있다. 그러나 영화의 99%는 진실 같은 허구로 만들어진다. 그래도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에 빨려 들어가 울고 웃는다.
어떻게 보면 우리네 생 자체가 한 편의 영화일 수 있다. 살아 숨 쉬는 영화. 또 한 편의 소설일 수도 있다. 삶으로 쓰는 소설. 투르 스토리다. 허구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오늘 하루도 우리는 삶의 소설, 혹은 생의 영화를 찍고 있다. 사실 지나간 날을 기억하면 긴 영화와 소설의 연속을 보는 듯하다.
영화와 소설 같은 생을 살았던 영화배우 최은희(92)씨가 지난 16일 별세했다. 애도하는 글을 보면 “영화에 살고 사랑에 살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파란만장한 세월이 은막너머로 흘러갔다”고 그의 죽음을 평한다. 그는 김학성과 이별하고 신상옥 감독과 결혼(1953)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후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1978년 1월14일 홍콩에서 납치돼 북으로 간 그는 같은 해 7월19일 납치된 남편 신상옥과 함께 북한의 영화계를 이끌었다. 이 때 만든 <소금>에서 최은희는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86년 3월13일, 신상옥과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해 10년 이상 망명생활을 하다 1999년 영구 귀국했다.
영화를 통해 혹은 소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받는다. 한 편의 영화가 수십만 명의 마음을 움직인 것도 있다. 1959년 미국에서 개봉된 <벤허>(Ben-Hur)다. 루 윌리스가 쓴 소설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원작이다. 기독교적인 호화 스펙터클 영화. 이 영화 한 편으로 수십만 명이 크리스천으로 개종했다는 후문이다.
지금도 떠오르는 영상들. 특히 전차경기. 이 영화는 의상과 조각제작자 300명, 엑스트라 1만명, 낙타 200마리, 말 2,500마리가 촬영에 동원됐다. 각종 장면은 세트를 이용해 촬영됐다. 세트란 일종의 허구다. 예수가 나병 걸린 모녀를 고치는 장면. 성경엔 없고 소설엔 있다. 그러나 허구인 이 장면이 수십만 명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다.
어제는 오늘의 허구일 수 있다. 내일은 또 오늘의 허구일 수 있다. 허구(虛構)란 픽션(fiction)이다. 픽션이란 사실이 아닌 가공의 인물 혹은 이야기를 뜻한다. 그렇다면 나 자신도 허구일 수 있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찍혀지는 생의 영화와 삶의 소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모두 허구로 밝혀질 수 있다. 허구는 그래서 꿈일 수도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면, 한 편의 꿈을 꾼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때가 있다. 꿈이란 무엇인가. 잠 잘 때 일어나는 영상의 무리들이다. 모두 허구다. 그러나 꿈속에서만은 진실이다. 하지만 깨어나 보면 거짓일 뿐이다. 우리네 생도 수명이 다하여 호흡이 멈추어질 때, 생의 영화와 삶의 소설은 모두 허구일 수 있지 않을까.
2011년 3월23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별세(79)했다. 최은희가 동양의 전통적 미인이었다면 엘리자베스는 서구의 전통적 미인에 속할 것 같다. 두 여인의 삶과 그리고 그들만이 가진 생의 영화. 엘리자베스는 7명의 남자와 여덟 번 결혼했다. 리처드 버튼과는 두 번 결혼. 말년의 알코올 중독과의 투쟁. 그리고 사망.
그가 레슬리 역을 했던 <자이언트>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1966년작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Who's Afraid of Virginia Woolf?)에서 알콜중독자 마사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34살의 나이로 어쩌면 그렇게 중독자 역을 잘 하는지. 미래의 그를 연기했던 걸까.
우리는 매일 자신의 영화를 찍고 소설을 쓰고 있다. 영화와 소설 같은 인생들이다. 최은희와 엘리자베스처럼은 찍혀지지 못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귀하고 하나밖에 없는 영화를 우리네는 찍고 있다. 아니, 찍히고 쓰여지고 있다. 하늘과 땅으로부터. 꿈같은 일생이 지나가도 영원 속에 영원히 남을 우리만의 영화(Movie)와 삶의 소설(Novel)을. 이것만은 허구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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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