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 햇살에 머무르며

2018-04-06 (금)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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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봄을 시샘이라도 하듯 날씨가 오락가락하고 있다. 고국의 산천에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화사하게 피었다는 소식이다. 마음은 이미 분홍빛으로 물들었건만 봄은 아직도 겨울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루하루의 시간은 살처럼 빨리 지나가는 데 비해 겨울은 점점 더 길어지는 느낌이 드는 요즈음이다.

비가 그친 오후의 햇살이 정겹다. 얼룩진 유리를 뚫고 들어온 햇살 한 줌이 말간 얼굴로 빨간 카펫에 길게 드러눕는다. 햇살은 사물이 정해준 위치마다 각기 다른 형상으로 명암을 새긴다. 투영된 곳에는 하얀 그림자로 꿈을 그리며 시간을 좇는다. 밟아도 요동하지 않는 의지는 어둠을 버리고 하늘로부터 내려온 희망의 날개짓 같다.

따뜻한 기운은 봄을 기다리는 지친 마음을 보듬어 준다. 찾아든 햇살과 좀 더 속살거리고 싶지만, 곧 떠날 기색이다. 구름이 햇살 향해 텃세를 부리는가 싶더니 기어코 소리 없는 이별이 시작되었다. 잠깐도 내 품 안에 머물게 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두었던 어리석음을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달랜다.


한겨울에 고국을 떠난 나와 가족은 미국의 동부에 둥지를 틀었다. 도시가 아닌 동네의 겨울은 눈이 내리면 적막강산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집 앞의 하얀 눈 위에서 산토끼가 뛰어놀고 있었고 뒤뜰에는 사슴 가족의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하얀 겨울의 침묵은 이민자의 초행길에 두려움을 동반하게 했다. 자동차 바퀴가 판화처럼 새겨놓은 두 갈래 길을 따르다 보면 뒤늦은 따사로운 햇살이 가고자 하는 곳의 길을 내어 주었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낯선 곳의 겨울 끝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길가의 우체통을 향해 자갈밭 사이를 걷던 중 작은 돌을 비집고 올라오는 질경이 싹을 발견하고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나의 등을 감싸주었던 햇살도 오늘처럼 포근했다. 고향에만 있는 줄 알았던 질경이 싹을 이국땅에서 마주했을 때의 자연 섭리에 직면한 경이로움과 감격을 지우지 못한 채 미국에서의 첫해 봄을 맞았다.

봄에는 모든 것이 꽃이 된다. 아직도 눈뜨지 못한 새순이 웅크린 채 차가운 세상 밖을 살피고 있지만, 핑크 공주 조카의 머리에는 어느새 분홍색 머리띠가 올라가 있다. 동네 아이들이 몰려나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놀이를 하며 쏟아내는 웃음꽃이 하늘까지 피어오른다.

아이들과 같이 뛰는 강아지 꼬리에도 털북숭이 버들가지가 상모를 튼다. 기억 속의 가지들이 차례로 옷을 걸치고 치장을 마치는 날에 꽃들의 축제는 시작될 것이다. 햇살은 밝히기 힘든 그들만의 약속을 알고 있기에 구름 뒤에 숨어 밀어를 속삭인다.

세상 바람을 가르고 물결 헤쳐 나가는 마음에도 한 줌 햇살은 스며들 것이다. 넉넉한 햇살이어야 차디찬 겨울을 참아내게 하고 쓰디쓴 불면의 나날도 지나가게 해줄 수 있다. 햇살 닮은 따뜻한 마음에는 향기가 있고 사랑을 싹틔워 여럿의 열매를 맺게 할 진리가 담겨있다.

쌀쌀맞은 사람 곁에는 사람이 머물 공간이 없다. 빛이 가려진 곳에서는 어둠만이 주인이 되고 희망의 싹이 자라지 못한다. 아직도 얼어붙은 땅속에서 눈을 뜨지 못한 새싹의 아우성을 햇살에 전해주어야겠다. 기다림이 더 길어지기 전에 오락가락하는 봄의 여정에 녹색 신호등 하나 밝히련다.

<고명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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