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황제’시진핑과 ‘차르’푸틴

2018-03-23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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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로 재선출되자마자 축전을 교환하고 전화통화까지 하며 ‘전면적 전략 합작 동반자’로서 친밀한 관계를 과시했다.

시진핑은 국가주석 연임 제한이 철폐되었으니 얼마든지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푸틴은 2024년까지 집권, 총 24년간 집권하게 되었다.

시진핑은 1953년 6월15일 베이징 출생으로 현재 64세다. 문화대혁명 시기 고초를 겪는 부친을 따라 농촌지방을 돌아다니며 자랐고 공직생활 동안 경제발전에 많은 공을 세웠다. 당 총서기에 취임하자마자 “호랑이(고위관료)든 파리(하급관료)든 모두 잡겠다”며 부정부패 척결을 선언했고 이것으로 많은 정적을 제거했다.


푸틴은 1952년생 10월7일 레닌그라드 출생으로 현재 65세다. 그동안 총리, 제3, 4대 대통령, 총리, 다시 4대를 거쳐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KGB 경력을 지닌 그는 체첸의 반란운동을 무력으로 잠재우고 우크라이나 군사개입과 크림반도 합병, 시리아 내전 개입에 이어 앞으로 강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제분쟁에 참여할 것이다.

적어도 10년이상 절대권력을 누릴 시진핑과 푸틴 두 지도자들에 대한 느낌이 좋지 않은 것은 바로 이웃나라가 한국이기 때문이다. 한국사에 가장 큰 비극인 6.25전쟁의 상흔은 아직도 깊고 넓다. 한국인이라면 ‘통일’이 뭔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지금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정작 그 육중한 통일의 문이 언제 열릴 지 예측할 수 없다.

남과 북의 얼어붙은 정국이 평창동계올림픽으로 인해 해빙되고 오는 4월 남북정상회담, 5월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지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지 아무도 모른다.
6.25전쟁이 일어나던 당시 중화인민공화국(당시 중공) 지도자는 마오저뚱이었고 러시아(당시 소비에트 연합) 지도자는 스탈린이었다. 해방 후 소련군은 북한지역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한반도 통일을 반대해왔고 결국은 공산정권을 세우려는 김일성의 전쟁계획을 스탈린이 승인했고 협조했다.

스탈린은 1937년 연해주의 약 18만명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장본인이다. 하루아침에 살던 집과 고향을 쫓겨나 1,800대의 화물열차에 태워져 6,000Km거리를 달려 황무지땅에 버려졌고 스탈린이 죽은 1953년까지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유배의 삶을 살았다.

중국은 또 어떤가. 1950년 6월25일 전쟁이 일어나자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시작으로 유엔16개국 참전군이 대대적 반격에 나섰다.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했으나 11월중순 중공군 50만명이 고원지대를 타고 내려오며 인해전술을 펼치자 전세가 뒤집히면서 1953년 7월27일 통한의 휴전선이 그어지고 말았지 않은가.

냉전시대 최초의 군사전쟁인 6.25는 이렇게 중국과 러시아로 인해 한반도에 비극이 시작되었다.

중국몽(中國夢)을 실현하려는 시진핑, 위대한 러시아의 부흥을 목표로 한 푸틴은 나란히 손잡고 미국 견제를 위한 공조에 나설 것이고 북핵문제에 적극개입할 것이다. 두 나라가 ‘황제’ 시진핑과 ‘차르’ 푸틴의 독제체제로 회귀하면서 자칫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던 당시 분위기를 추종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1914년은 민족주의 열병이 전 유럽국가의 핵심이념이 되어 행동하는 젊음이 최상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되었던 시기다. 파리, 런던, 베를린 각 도시마다 출정하는 군인들을 가족들이 꽃다발을 안기며 보내주었고 군인들은 조국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누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가에 의미를 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참혹했고 전쟁에 대한 환상도 무너져갔다.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민족주의 열광은 무서운 결과를 낳고 절대강자의 절대관력은 갑자기, 손쉽게 붕괴될 수 있음을 많이 봐왔다. 지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기운이 ‘어떤 광기’가 아닌 ‘평화로 가는 길’이 되기 바란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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