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한국에서의 휴가 마지막날 가까스로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디자인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정선’전을 볼 수 있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주최로 신윤복의 ‘혜원전신첩’의 단오풍정, 월하정인, 쌍검대무 등 원작을 보았는데 파란치마, 하늘색 저고리, 빨강의 화려한 색채가 그대로 살아있을 정도로 보존상태가 좋았다.
그러나 18세기 조선최고의 진경산수화가 겸재(謙齋) 정선 (1676~1759)의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명승지 원화 3점은 아쉽고 미진했다. 실험적이고 모던한 미디어 아트와 결합하여 젊은이들에게는 익숙한 콘텐츠 형태로 전시했다는데 내게는 영 다가오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정선의 금강산 그림에 대한 아쉬움이 원 없이 풀린 것은 메트 뮤지엄 한국관에서였다. 이곳에서는 정선의 작품 11점과 함께 19세기~20세기 유명 현대작가들이 금강산을 묘사한 ‘금강산: 한국미술속 기행과 향수’ 전이 한창이다. 정선이 1711년 금강산을 유람하며 그린 ‘정선필 풍악도첩 중 금강내산총도, 단발령만금강, 불정대, 백천교, 해산정, 총석정 6점을 비롯, ‘봉래전도(두루마리 형식)’, 부채에 그린 정양사 등등 내금강과 외금강 산봉우리, 골짜기, 계곡의 폭포 등의 웅혼한 기상이 대단했다. 푸른 숲을 만지면 푸른 물이 들 것같이 촉촉하고 옥을 깎아 만든 듯 날아갈 듯 아름다운 일만이천봉 봉우리, 강한 농담의 대조가 음양의 조화를 이루었고 거침없이 내려간 붓질에 강한 에너지를 느꼈다.
전시작 중 가장 낡았지만 ‘금강내산전도’는 미국에 처음 선보이는 것으로 2006년 독일에서 반환되어 왔다고 한다. 1974년 독일 유학생이 성오틸리엔 수도원 보레르트 베버 원장이 1925년 한국 가톨릭교구 시찰로 왔다가 금강산 여행길에 지인들로부터 겸재의 그림들을 선물로 받아 수도원에 기증했다는 ‘금강산 여행기’를 읽었다. 그래서 독일의 정선 화첩이 1977년 한국에 알려졌고 독일은 성오틸리엔 수도원의 한국진출 100주년을 맞아 2009년 한국문화재를 반환한 것이다.
정선은 20세에 도화서 화원이 되어 30세 전후부터 전국 명승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영·정조 시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화사하게 꽃 핀 시기로 산수유람을 다녀와 이를 기록하는 문화가 일상화된 시기였다.
당시 중국 명나라 문화와 문물을 모방하여 수많은 화가들이 중국 그림을 따라했다. 대가의 그림에 화선지를 밑에 대고 베끼기도 하고 원작을 옆에 두고 그리고 화풍을 익힌 후 그 화풍으로 새로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명나라가 망해가고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어도 조선지식인들은 여전히 명나라를 숭배하는 조선 중화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이때 정선은 우리 고유 화풍을 만들어 우리 산천을 그렸기에 독보적 위치에 섰고 조선시대 화성(畵聖)으로 추앙될 만큼 이름을 남겼다. 그는 만 83세까지 천수를 누려 80이 넘어도 붓을 잡았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 겸재가 80여세가 되어도 여러 겹의 두꺼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터럭만큼도 실수가 없었다. ’고 나올 정도다. 북경에서 그의 그림은 인기최고였다. 독창적인 우리 것은 수백년 세월을 간단히 뛰어넘는다.
그런데 정선이 사랑한 이 금강산은 현재 북한 영토다. 한국민들은 갈래야 갈 수가 없다. 1998년~2008년 남북간 금강산 관광이 허용된 적이 있다. 이 남북간 기류라는 것이 항상 변하는 것인데 갑자기 중단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오는 4월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위원장이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 앞으로 금강산 관광이 다시 열린다면 그때는 꼭 금강산을 보러 갈 것이다.
요즘들어 금강산 노래(강소천 작가 나운영 작곡)가 귓전에서 계속 들린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청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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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