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1 만세운동과 기독교

2018-02-26 (월)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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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이것은 ‘3.1절의 노래’ 첫 소절이다. 기미년이라면 1919년이다. 그로부터 꼭 99년이 경과되었다. 3.1절이 국경일이지만 3월 초하루에 무슨 일이 일어났고 왜 중요한 날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아, 새 하늘과 새 땅이 눈앞에 펼쳐지누나. 힘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누나...”로 이어지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으나 전덕기 목사(상동감리교회)댁에 기거하면서 성경을 배우고 자유의 이념과 비폭력정신을 몸에 익혔다. 물론 33인 중 이상재 선생 같은 무저항주의자, 길선주 목사 같은 사랑의 사도가 있어서 3.1 만세운동을 비폭력으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독립선언문 서명자 33인 중에 16명이 기독교인이다. 그 당시 전국의 기독교 신자는 26만 명(인구의 1.5%) 밖에 안 되는 극소수의 집단이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을 해냈다.
사학자 이 만열 교수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약 1,400 군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그중 78 지역이 교회가 중심이 되었고, 천도교 중심이 66곳,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하여 거사를 일으킨 지역이 42곳이다.


기미년 당시 2,100 개의 전교회와 26만의 전교인이 단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거사였다. 그래서 그 당시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존경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추앙되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이 한국 인구의 23%라는데 과연 민족의 선구자가 되고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기미년에 교회당 소실 80처, 기독교 계통학교 파괴 8개교, 투옥된 교인 3,373명, 목사 54명, 전도사 157명, 장로 63명이 감옥에 갇혔다. 일제는 어린 여학생들을 십자가에 알몸으로 매달아 인두와 칼로 고문한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있다.(박은식의 한국독립사) 그러나 조선의 크리스천 여학생들은 자유와 독립을 외치며 죽어갔다. 신앙의 힘이었다. 조선에 들어온 예수 바람은 곧 새 바람이며, 개화의 바람, 인간 해방의 바람이었다.
3.1만세운동 직후, 즉 1919년 3월 22일 조선총독부는 선교사 대표 9명을 초청하여 긴급 좌담회를 열었다. 마펫 선교사, 노불 선교사, 웰치 감독 등이었는데 모두 30년 이상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참들이다.

3.1운동을 기독교가 주도한 이상 그 원인을 분석하여 재발을 막자는 것이 모임의 취지였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일제 관헌들에게 말하였다. “조선인에게는 물질보다 중요한 것이 의(義) 곧 정의로운 삶입니다. 그들에게는 굶어도 사람답게 대접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의인(義人)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두 가지를 생활에 옮기면 된다. 하나는 악과 부조리, 사람을 괴롭히는 사태를 고발하는 용기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절망 앞에서 굴복하지 말라. 지금도 희망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그대의 목청이 허락하는 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예수는 자기의 사명을 이렇게 천명하였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누가복음 4:18-19) 즉 갇힌 데서 풀어주고, 눈을 뜨게 해 주고, 압박에서 놓아주는 것이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는 것이 예수의 메시지였다. 바울은 죄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독교의 메시지로 제시하였다.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교회에 교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일본 헌병대가 문을 봉쇄하고 불을 질러 전원을 태워 죽인 참사가 있었다. 선교사 한 사람이 숨겼던 카메라로 현장을 촬영하여 전 세계에 그 만행이 공개되었다.

<최효섭/아동문학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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