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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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며 건너가기

2018-02-23 (금)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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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이른 아침부터 아내가 창가에 화분들을 내어 놓고 마른 잎들을 떼어 내며 바쁘게 움직였다. 휴가를 떠나느라 집을 비운 사이 화초들이 누렇게 시들어 버렸다고 안타까워 했었는데 마침내 묵은 뿌리에서 새 순이 올라 오고 있다며 반가워 했다.

지루한 겨울을 보내고 봄을 서둘러 맞고 싶은 마음은 우리들 뿐 아니라 작은 화분 속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나 보다. 하기야 입춘도 벌써 지났으니 이제 봄이라 불러도 좋으련만 아직은 심술궂은 동(冬)장군이 봄이 오는 길목을 막고 서 있으니 아직 나는 두꺼운 외투를 벗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늦은 가을에는 아끼던 꽃 화분 몇개가 얼어 버렸다. 한 낮의 짧은 햇볕에 잠시 내놓았던게 화근이었다. 언 가지들을 잘라 주고 새 순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미안해 하던 아내는 따뜻해지면 분갈이를 해야 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아마 벼르던 그 날이 온 듯 싶었다. 펼쳐 든 신문 너머로 슬쩍 훔쳐 본 아내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조심스럽게 화분을 쏟던 아내가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질렀다.


아내가 쏟아 놓은 화분에서 작은 실지렁이 한마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놀란 아내 대신 얼른 뿌리에 새 흙을 덮어 준 다음에야 아내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어떻게 실지렁이가 화분 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실지렁이 한마리가 언 화분 안에서 생명을 살리는 역활을 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혹시 함께 살고 함께 견딘다는 것이 이런게 아닐까?

모처럼의 주말 나들이를 계획하고 나니 겨우내 굳게 닫아 두었던 일상에 여유가 좀 생기는듯 했다. 시험준비로 바쁜 작은 아이를 방문하기로 결정하니 아내의 손길은 더욱 바삐 움직였다. 아이가 좋아 할 만한 음식들을 준비하는 동안 즐거운 모양이었다.

아침에 출발하면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도 초저녁이면 돌아 올 수 있는 거리임에도 아내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다. 아내의 재촉을 설레임으로 이해하며 차에 올랐다. 네비게이션이 지름길이라고 알려 주는 길은 우리가 늘 다니던 길에서 벗어난 낯선 산 길이었다. 산 속으로 이어진 길 끝에 작은 마을이 있었고 지나가는 길목 곳곳에는 겨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짧은 해가 마음에 걸려 서둘러 귀로에 올랐을 때는 아침의 봄 기운은 어디론가 가 버리고 음산한 겨울 날씨에 바람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산속의 겨울 초저녁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찌감치 어두워졌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어둠속의 산길은 부담스러웠다.그러나 나무를 배경으로 흔들리는 서녘은 오래도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성급한 봄 나들이에 나섰다가 결국 내가 보고 온 것은 눈 쌓인 나무들과 산 아래로 흐르는 언 강과 높은 바위를 덮고 수직으로 서 있는 얼음 기둥과 고요한, 들리지 않는 겨울의 숨소리 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그 사이를 넘나 들며 계절을 건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이 다른 두개의 세계를 경계라 했고 어떤 이는 일상의 선물이라 했었다. 돌이켜 보니 선물은 늘 그 경계로 부터 오고 있었음을 잊고 있었다.

새해를 맞은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의 끝자락을 잡고 서 있다. 그러고 보면 어느 시인이 노래한 대로 ‘벌써’ 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없는 것 같다. 묵묵히 견디며 건너온 겨울을 보내고 이렇게 비워진 자리에서 ‘벌써’ 봄을 맞고 있는 것이다.

<최동선/커네티컷 전 한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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