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심야 식탁]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2018-02-07 (수)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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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 식탁]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천운영 소설가

[심야 식탁]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구운 파프리카와 함께 먹는 돼지고기. <천운영 작가 제공>


마흔이 넘은 후배 녀석 하나가 연애에 또 실패했다며 징징거린다. 엄밀히 따지자면 연애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봉짓거리만 하다가 끝났다는 것인데.

이제 그만 좀 방황하고 정착 좀 하는 게 어떠냐 묻자, 팜므파탈 같은 여자만 좋은 걸 어떻게 하냐고 도리어 신경질이다. 그럼 계속 봉짓거리나 하시든가. 파프리카 같은 여자 어디 없어요? 그럼 더 이상 방황 안 할게요. 또 파프리카 타령이다. 녀석의 이상형 파프리카는 곤 사토시의 애니메이션 ‘파프리카’에 나오는 열여덟 살 ‘꿈 탐정’의 이름이다.

‘파프리카’는 쓰쓰이 야스타의 동명 SF소설을 원작으로 한 환상적인 SF 미스터리 에니매이션이다. 사람들의 꿈 속에 들어가 불안과 신경증을 치료하는 획기적인 장치 ‘DC미니’가 도난 당한 후, 잇따라 다른 사람의 꿈에 침입해 악용하는 꿈 테러의 음모를 파프리카가 밝혀내고 해결한다는 이야기. 파프리카는 냉정하고 명석하고 차가운 스물아홉 살 정신치료사 치바의 또 다른 내면이다. 치바와는 다르게 대담하면서 발랄하고 즉흥적인 열여덟 살 소녀. 파프리카는 딱 그 소녀를 닮았다.


파프리카는 스페인어로 피멘토라 부른다. 콜럼버스가 중앙아메리카에서 카스카벨이라는 녹색 고추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을 향신료 후추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후추처럼 자극적이고 후추보다 얼얼한 매운 맛을 가진 이 고추를 후추라는 뜻의 피멘타와 짝을 지어 피멘토라 불렀다. 이름은 후추(Pimienta)로부터 비롯되었지만, 파프리카(Pimiento)는 피망과 함께 고추의 동족이다. 매운맛이 덜한 고추라고 할까? 그래도 고추는 고추. 단맛 뒤에 은근히 감겨오는 매운맛은 파프리카의 또 다른 내면이다. 파프리카 내면의 매운 맛은 파프리카 가루 피미엔톤(Pimienton)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스페인의 대중적인 음식 중에 파프리카를 채운 이라는 의미의 피미엔토 레예노(Pimiento Relleno)라는 것이 있다. 같은 이름을 쓰지만 전혀 다른 음식 두 가지. 하나는 생 파프리카에 밥과 각종 견과류, 말린 과일 등을 채워 오븐에 구운 요리이고, 또 하나는 파프리카를 구운 다음 그 속에 대구살이나 으깬 감자 등을 채운 요리다. 파프리카 안에 무언가를 채워 넣은 것은 같지만, 파프리카를 먼저 구워 채우느냐 채운 다음 굽느냐의 방식이 다르다. 그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이 나오는 건 물론이다. 그래서 가끔은 자세한 설명은 보지 않고 피미엔토 레예노를 주문한다. 무엇이 나올지 무엇을 채웠을지 궁금해 하면서.

구워서 껍질을 벗겨낸 파프리카는 당도는 높아지고 질감은 쫄깃하게 부드러워진다. 꼭 통조림복숭아를 먹는 느낌이다. 아주 달기만 한 건 아니고, 파프리카 특유의 알싸하고 상큼한 향이 남아 있어서, 스테이크와 참 잘 어울린다. 불에 직접 구워 탄내까지 가미되면 금상첨화. 그래서 돼지구이와 함께 곁들여져 나온 구운 파프리카에 탄 껍질이 조금 붙어 있는 걸 보면, 곁들이 음식이 아니라 메인 요리로 승격. 파프리카를 맛보기 위해 돼지고기를 조금씩 집어먹게 되는 것이다.

파프리카 맛의 정점은 가루에 있다. 아주 곱게 간 태양초 같은 느낌인데 자극적이지는 않다. 파프리카가루는 은근히 스며드는가 하면 대담하고 발랄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고기의 잡내를 제거할 때나, 닭이나 돼지 통구이를 할 때, 은근슬쩍 스며들며 기를 살려 주는 존재. 올리브유에 끓인 새우(Gambas)나 삶은 문어 위에 듬뿍 뿌리면 익숙하면서도 뭔가 이국적인 맛이 난다. 헝가리 스튜 굴라쉬(Gulasch)는 치유의 느낌마저 든다. 모든 게 피미엔톤 덕분이다. 나는 파프리카가 아니라 파프리카 가루 같은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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