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상처 받을라…’ 망설이다 교회 멍든다

2017-11-15 (수) 유정원 종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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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 알지만 어떻게 정죄해?, 죽어가는 프로그램 방치 등

▶ ‘의로움’ 없는 사랑 난립 문제

‘상처 받을라…’ 망설이다 교회 멍든다

교회 소그룹 모임에서 교인들이 서로 기도하며 축복하고 있다.

성경은 사랑과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을 증거한다. ‘의로움’이 빠진 사랑은 이미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랑과 정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 불변의 기준이다.

교회 안에서 사랑이 ‘난무’하곤 한다. 의가 증발된 멋대로 사랑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과 멀어진다. 인간을 의식한 사랑은 자주 어둠의 도구로 전락해 교회를 수렁으로 몰고 간다.

크리스천 라이프웨이 대표 톰 레이너 목사는 13일 ‘교회를 망치는 친절과 배려’라는 제목의 칼럼을 공개했다. 레이너 목사는 “한 사람이나 또는 몇 명의 교인에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워 교회 전체를 희생시키는 목사와 장로가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친절하게’(being nice) 대하는 것이야 중요한 선행이지만 자칫하면 교회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섣불리 ‘나이스’하려다 교회에 큰 타격을 입히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필요는 알지만, 그래도 내가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는 유형을 들 수 있다. 이런 게 기독교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주장하는 교인들이 있다. 하지만 레이너 목사는 지나친 합리화라고 지적한다. 대부분 성도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너무 나이스(nice)해서 오히려 아무 일도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은 ‘죄와 정면으로 대치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는 자주 “우리가 누구건대 사람을 판단하느냐?”고 주장한다. 겉으로 듣기에는 ‘나이스’한 합리적 이성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당사자인 교인이 누가 봐도 명백한 죄악 속에 살고 있다면, 이를 좌시하는 것은 성경적 의무를 외면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불필요하거나 죽어가는 사역과 프로그램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과 모든 프로그램은 영향력과 효과를 왕성하게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해당 사역에 감상적으로 몰두한 몇몇 교인을 의식해 방관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네 번째로 쓸데없이 놀리거나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교회 공간이나 시설도 존재하지만 손을 대지 못하는 경우다. 교인이 늘면서 사역을 위해 공간이 필요하게 돼도, 그 공간을 차지한 몇 사람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도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기독교인이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나이스’한 행동이 아니다.

다섯 번째로 ‘어떤 이의 감정이나 기분을 고려해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히 변질시키는 케이스’가 해당한다. ‘생각의 폭이 좁다’거나 ‘너무 완고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교회 리더들이 있다. 하지만 복음은 ‘편협’하고 ‘독선적’이다. ‘교회에 꼭 나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게 ‘나이스’한 줄 착각 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게 ‘지옥에 가도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다음으로는 ‘봉사에 나선 교인을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계속 두는 것’도 포함된다. 예를 들어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성도가 구태여 안내 또는 새신자 환영 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옆에서 그 교인을 아무리 돕는다고 해도 갈등과 불협화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당사자에게 다른 사역팀으로 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럴 경우 결코 그 사람을 생각해서 ‘나이스’하게 구는 게 아니다.

마지막은 ‘재정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어느 교회는 교인이 줄면서 은퇴한 노인 45명만 남았는데도, 풀타임으로 신학생 사역자를 유지했다. 심각한 문제였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아무도 변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았다. 결국 교회는 재정이 파탄됐고 문을 닫아야 했다.

<유정원 종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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