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154)1928년의 대통령 선거

2017-04-28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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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의 대통령선거는 미국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준 선거이었다. 출마자들 조차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하였겠지만 1928년 대통령선거의 당선자는 다음해인 1929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5년 여간 지속된 미국의 대공황과 숙명적으로 임기내내 씨름을 해야만 했었고 “억울하게도 무능대통령” 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선거이었다. 보수적이고 친재벌적인 Harding 과 Coolidge 두 대통령의 임기 중에 구조적으로 깊이 곪아버린 미국의 경제는 꽤 “현명한 의사” 라고 알려졌던 Herbert Hoover 대통령의 필사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겨우 기사회생해서 숨을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결국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이라는 “대 명의” 가 5장6부 부터 깨끗히 씼어내는 대수술을 감행하고 꾸준히 치료를 시작한 1933년부터 건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가 시작 되면서 경기호황이 일어나서 라디오, 축음기, 전기냉장고 등이 대거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동력원으로 증기기관이 아니고 전기모터를 써서 공장들의 생산성이 더 높아졌다. 극장은 활동사진을 보려고온 관객들로 꽉 찼으며 수만 명이 모이는 스포츠 운동장들도 분주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모자랐던 일손을 채우기 위해 도시에 몰려든 흑인들은 종전후 에도 계속 눌러앉았다. 이들을 따라온 “순국산” (미국) 음악인 jazz, rag time, blues 등의 훅인음악들이 Louis Armstrong, Duke Ellington, King Oliver, Bessie Smith 등의 음악인들의 음악이 수천만장씩 팔린 record 를 통해 미국의 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1914년부터 Frederic W. Taylor 의 Scientific Management 에 기초를둔 Assembly Line 공법으로 Henry Ford 는 자동차를 대량으로 저렴하게 제조하기 시작하여 차 한대의 조립시간을 93시간에서 96분으로 줄였고 1925년에는 매 10초마다 완성된 차가 한대씩 굴러 나왔다고 한다.

이 무렵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Charles A. Lindbergh 가 New York 을 출발하여 마치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33.5 시간의 단독 비행끝에 Paris 에 1927년 5월 21일 밤에 도착한 것이었다. Lindbergh 가 뉴욕시내를 행진하자 “그를 환영하던 뉴욕시민들은 고층건물 에서 1800 톤의 종이를 흰눈처럼 뿌리며 그를 환영 하였다. Lindbergh 는 전국을 순회하며 항공우편과 비행기 여행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다. 부부가 조종사로써 최고의 인기가 있었던 Lindbergh 의 어린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된 후 미국에는 유괴범 가중처벌
법이 생겼다. 영웅이었던 Lindbergh 를 대통령으로 뽑자고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1920여년 부터 시작된 미국의 호황기가 끝나가던 1928년에는 도시와 외곽도시에 사는 인구가 농촌에 사는 인구보다 많아지기 시작하여서 미국의 중서부와 남부의 농업지구가 대통령선거에 큰 비중을 주던 마지막 해이기도 하였다. 1928년의 대통령선거에서 격돌하였던 양당의 후보들에 대해서 간단히 써보고자 한다.

민주당후보는 “Happy Warrior” 라고 불렸다는 Al (Alfred) Smith 뉴욕주지사이었다. 그는 Irish 계 이민자로써 집안형편이 어려워 11살때 학교 교육을 끝내고 나머지 인생교육은 뉴욕시내의 험난한 길거리에서 마친 사람으로 억센 뉴욕 액센트를 써가며 바닥부터시작해서 출세한 개혁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 기반은 뉴욕시 정치를 주름잡고 있었던 Tammany Hall 이었다. 당시 뉴욕시는 소구역별로 보스가 있어서 새 이민자들의 어려운 일들을 돌봐주고 일자리도 알선해주고 가끔 작은 액수의 용돈도 나누어 주며 재판소, 경찰이나 관공서와의 잡다한 문제들도 대변해 주면서 주민들을 점조직처럼 관리 하다가 선거 때가 되면 표를 모아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Tammany Hall 이었는데 모든 것이 서튼 새 이민자들 에게는 꼭 필요했던 봉사기관 이기도 하였으며 좋은 의미로는 grass root democracy 가 뿌리내리기 위해서 필요한 조직이었다.

이런 소 Boss 들을 Tammany Hall 이 관리 하였고 Tammany 를 장악하는 사람은 뉴욕시 정치를 주물럭 거릴 수 있었다. Tammany Hall 은 뉴욕시정부 부정의 온상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뉴욕시의 정치가 “순조롭게” 돌아가도록 만드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도 하였다. Smith 는 Tammany Hall 을 장악한 실력자로서 이미 1924년 대통령 후보공천 대회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능했던 재무장관이었으며 전시중 전국의 철도를 질서정연하게 총괄했던 윌슨 대통령의 사위 William G. McAdoo 와 대통령후보 자리를 놓고 극렬하게 경선을 벌였다. 16일동안 한여름 찜통 대회장에서 102차례의 투표에서도 결판이 나지않자 민주당은 제3위의 John W. Davis 를 후보로 공천했고 대통령 본선거에서 공화당의 Coolidge 후보에게 참패하였다.

1928년의 대통령선거에 Smith 는 민주당공천으로 출마하였으나 공화당의 Herbert Hoover 후보에게 패배 하였다. Smith 는 미국최초의 Catholic 대통령후보이었으며 금주법 반대주의자이었다. WASP 가 주류인 미국사람들은 만일 천주교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의 대통령이 로마교황의 지시를 받게 될 것이라고 거부감을 가졌는데 그때 쯤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한 Ku Klux Klan 이 중서부와 남부의 투표자들이 천주교인인 Smith 를 반대하고 Hoover 를 지지하도록 만드는데 성공 하였다.


이때의 선거에서 Smith 는 대도시들에서 선전하였는데 그후부터 대도시들과 농업지역들의 표는 자주 반대로 갈라서기가 일쑤였다. 그 이후 부터는 미국의 12개 대도시의 표가 대통령선거에서 큰 비중을 갖게 된다.

공화당에서는 아주 유능한 광업 엔지니어로써 40대가 되기 전에 백만장자로 자수성가한 Herbert Hoover 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그는 Harding, Coolidge 두 대통령 밑에서 오랫동안 상무장관을 지내면서 그들의 보수적이고 친재벌적인 정책의 집행에 앞장서 왔는데 그는 기업들을 모든 규제에서 최대한으로 풀어놓아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 신봉자이었다.

그는 “친재벌주의자” 라는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Wilson 대통령 밑에서 Food Administration 청장으로 일했을 때 매우 창의적인 정책을 썼던 것으로 호평을 들었으며 상무장관으로 재직했을 때에 “정부비용절감 연구부서”를 설립하여 정부의 행정에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을 창안하도록 하여 정부의 총 비용절감액이 상무부 총예산 액수보다 더 많아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Hoover 는 Quaker 교도의 집안에 태어났는데 열 살때 고아가 된 사람이었으나 자력으로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mining engineering 을 전공한 인재였다. 그는 Wilson 대통령 밑에서 30대에 해군차관을 하고 있던 Franklin D. Roosevelt 로부터 “Hoover 를 앞으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한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중국, 유럽제국을 돌아다니며 탁월한 mining engineer 로써 컨설팅과 투자하여 부자가 되었는데, 특히 오스트랠리아에서 광산투자로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벨지움 등 유럽국가들의 천만 명 인구들에게 식량을 조달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그의 자상하고 배려가 깊었던 행정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Hoover 는 2,100만 표를 받아 천500만 표를 받은 Smith 를 압도하여 8개 주를 제외한 모든 주들에서 승리하였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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