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153) 제30대 Calvin Coolidge 대통령

2017-04-21 (금)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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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mont 주의 촌락 Plymouth Notch 에서 Justice of the Peace (미국의 소도시에서 선거로 뽑히는 촌락 판사로써 변호사 면허증도 없는 사람들도 많음) 로 일하고 있는 아버지 John Coolidge 의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Calvin Coolidge 부통령은 새벽에 “Harding 대통령이 서거 하셨읍니다” 라고 소리치며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잠이깨어 석유등불을 켜고 아버지 Coolidge 판사 앞에서 잠이 덜 깬 채로 얼떨결에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고 제30대 미국대통령이 된다.

어느 의미에서 이 어설펐던 대통령 취임식은 “얼떨결에 잠이 덜 깬 것도 같았던” Coolidge 대통령임기의 시작을 상징한 것도 같다. 1923년 8월 2일에 각료들의 부패로 시달려오던 Harding 대통령이 임기를 1년반을 남겨 놓은채 심장마비로 사망했던 것이었다.

여행도 고향인 Vermont 나 정치기반지인 Massachusetts 를 멀리 떠나서 해본 적이 없었고 부통령에 당선 되었을 때까지 한번도 Washington 을 가본 적이 없었다는 “촌놈”이었던 Coolidge 는 Massachusetts 주지사 재임시 Boston 에서 일어난 경찰관 파업을 단호하게 진압했다는 공적이 높히 평가되어 부통령 지명을 받았으나 정치경력은 Massachusetts 주의 Northampton 시장, 부지사, 지사등이 전부인 인물이었다.


Coolidge 는 활발하고 Cigar 를 피우며 친구들과 백악관에서 card game 을 즐겼다는 Harding 과는 극히 대조적인 사람으로써 “Silent Cow” 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말이 없고 근엄하고 “멋대가리가 없었던” 인물이었다. 집 한칸도 없어서 Northampton 의 두세대 연립주택의 한쪽에서 월 27불의 집세를 내고 살았었다는 것으로 보아 권력형 치부를 했던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Coolidge 와 Harding 의 한가지 공통점은 두 사람이 다 “친기업” 정치인 이었다는 것이어서 그들은 미국역사에 “친기업, 친재벌 정책의 발자취”를 남기었다. 사실은 말이 와전된 것이었음이 후일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Coolidge 는 “The business of America is business.” 라는 명언을 남겼다고 해서 두고두고 핀잔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Teddy Roosevelt, William Taft, Woodrow Wilson 등의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대통령들은 3대에 걸쳐 25여 년 동안에 미국의 정치, 사회, 경제를 개혁해 왔었다. 그들의 꾸준한 진보적인 개혁정책의 덕택으로 미국의 자본주의는 재벌들 만이 독식하는것이 조금 어려워졌으며 비교적 공평한 부의 분배가 중하층에 까지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대통령을 지냈던 Harding 과 Coolidge 는 친기업, 친재벌적인 정치인으로써 “The government is the best which governs the least” 라고 말했다는 제3대 Thomas Jefferson 대통령과 비슷한 통치철학을 가졌었다 한다. 그들은 정부의 규제는 줄이고 세율은 낮추어서 기업들이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대통령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정부의 통제가 늘어나고 여러 가지 생활필수품의 배급까지 경험해야 했던 미국사람들은 정부규제의 완화를 원했고 Harding 과 Coolidge 의 정책은 이와 같은 국민들의 시대적인 정서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대통령의 친재벌정책은 극심한 소득불균형이 시작되도록 하였으며 192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의 불씨를 심어 놓았다.

Harding 의 잔여임기 1년반을 마친 Coolidge 대통령은 공화당의 후보로 1924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과 신진보당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Coolidge 는 그의 정치적 업적이 있어서 당선되었다기 보다는 극도로 분열된 민주당의 약점과 진보지지 성향의 표를 분열시킨 신진보당 후보의 출마로 어부지리를 얻었다.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공천대회에서 542대 543 으로Ku Klux Klan 을 규탄하자는 동의를 부결시킬 정도로 분열되어 있었고 한여름에 냉방도 없는 뉴욕의 Madison Square Garden 에서 16일동안 102번의 투표를 했어도 선두주자 두 명 간에 결정을 못하게 되자 세 번째 후보를 공천했을 정도로 분열이 되어 있었다. Coolidge 는 압도적인 표수차로 당선되었다.

기업들이 최대한의 이익을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것이 정부의 임무라고 생각했던 Coolidge 는 기업들의 규제를 위해서 만들어진 공정거래위원회 (FTC) 나 연방금융위원회 (FRB)등의 연방기관에 감독보다는 기업에 협조를 하는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예를 들자면 공정거래위원회는 기업들이공정한 거래를 하도록 권장 하기보다는 기업들이 산업별 협회 등을 통해서 자율적으로 협약한 약속들을 지키라고 권장하였는데 이러한 협약은 대개 재벌들에게 유리하고 기업독점이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Hoover 상무장관은 기업체들간에 혈투경쟁을 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기업간에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제품의 질을 향상하기 위해서 협조해야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이것 역시 재벌들에게 유리한 발상이었다.

과거에 연방대법원은 진보적인 판결로 개혁성향의 대통령들을 지지해준 적이 많이 있지만 이때의 보수적이었던 대법원은 Coolidge 의 친기업정책의 집행을 도와 주었다. 예를 들어 1920년에 대법원은 미국 철강업 40%를 점유하고 있었던 U.S. Steel Corp.이 “과당하게” 기업경쟁을 방해하는 독점기업은 아니다 라고 판결해 주었
다.
대법원으로부터 이같은 청신호를 받고 Hoover 상무장관의 협조와 감독기관들의 묵인아래 미국 전국에서는 초대형 재벌기업들을 만들기 위한 기업들의 경쟁적인 합병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 결과로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되던 1929년에 이르러서는
1289 개의 대기업체들이 미국 전 생산품들 중 4분의3을 독점 생산하게 된다. 많은 업종들 중에서는 대재벌회사가 가격과 거래협약들을 정해서 협회에 통보만 해두면 그것들이 협회의 자율적인 협약이라고 인정 되었다.

보수적인 대법원은 이러한 관행들을 묵인하여 주었고 기업들은 활발하게 성장을 했고 미국은 1920년대의 경제적 boom 을 경험하게 된다. 대다수의 미국민들은 그전보다 조금 더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고 증권시장에서 거의 모든 주식들의 가격이 급격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장기적으로는 구조적 부조리 때문에 미국경제가 곪기 시작하고 있었으나 단기적으로는 경제전망이 아주 밝아 보이던 혼동스러운 시대에 들어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후 “대부분”의 산업들과 미국민들이 호황을 경험하고 있었으나 방직, 제혁, 무연탄광과 농업전반이 햇볕을 보지 못하였으며 흑인, Mexico계 미국인, 미국 원주민등은 경기호황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농업분야의 불황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이기도 하였지만 그때 쯤에는 농민들도 불평을 조직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받아지게 되었다.

미국의 농산업계는 그때나 그 이후에도 항상 과잉생산이 문제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경기호황으로 수입이 늘어나고 있었으나 농민들은 일을 열심히 할수록 과잉생산이 더 늘어나 농산물 가격은 계속 떨어져서 수입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세금을 포함하여 연료 등 농업용 원자재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정부에 농업부문 구제책을 요구하자 정부는 미국내의 농업보호를 한답시고 농산물 수입관세를 올렸는데 과잉생산으로 농산물이 넘쳤던 까닭에 농산물 가격은 수입관세의 인상에도 불구하고 계속 하락 하였다. 드디어 농민들은 농산물 가격 하락 방지에 정부가 직접 개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주요 곡물가의 하락 방지책으로 국회는 1924년과 1926년에 대책입법을 시도했으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였다. 드디어 1927년과 1928년에는 정부가 과잉생산된 주요 곡물을 구입하여 저장하고 있다가 곡가가 회복될 때에 시장에 내어놓거나 수출을 하도록 하는 입법을 하였으나 Coolidge 대통령은 “농사일들은 항상 가난한 직업이 었다…” 라는 차가운 논평을 하며 두 번 다 veto 를 하면서 다음 정권으로 농업부문 골치 덩어리를 떠넘겨 버렸다. 그는 1928년의 대통령선거에 재출마하지 않았다.

<조태환 /LI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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