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해서 비를 간절히 기다리던 때를 잊어버린 채, 하루가 멀다 않고 내리는 비에 약간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캘리포니아의 가뭄이 거의 해갈되었다니 감사할 일입니다. 매일같이 흐리고 비가 올 것만 같더니 지난 주간에는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기온도 꽤 많이 올라가서 한낮에는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길가 가로수들의 가지마다 아기 손처럼 연한 잎들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세상 밖으로 피어났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연두색 새잎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듣습니다.
계절을 좇아 어김없이 싹을 내고 한 해를 준비하는 자연 만물 속에서 신실하신 하나님도 만납니다. 봄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농부들은 봄철에 씨를 뿌리면서 한 해 농사를 시작합니다. 세상 만물들도 싹을 틔우면서 한해살이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봄은 새색시처럼 살며시 왔다가 수줍은 듯 뒷문으로 금세 빠져나갑니다.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칠 봄을 느끼려면 우리의 감각을 모두 동원해야 합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붙들어 매 놓을 수 없기에 순간순간 봄기운을 만끽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도 봄은 시작의 계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하다가 모세의 인도로 해방된 때가 봄이었습니다. 고집스러운 이집트의 바로 왕은 하나님께서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내리시는 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던 히브리 민족을 쉽게 내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비극적인 열 번째 재앙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룻밤에 이집트의 장자는 물론 짐승의 첫 번째 새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집트에 대재앙이 내리던 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습니다. 이집트를 휩쓸고 간 죽음의 사자는 어린양의 피가 묻혀진 이스라엘 백성의 집들을 건너뛰었습니다.
유월절(逾越節,pass-over)의 시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밤에 재산과 생필품을 모두 챙겨서 이집트를 빠져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훗날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해방된 날을 그 해의 첫 달로 정할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시작점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이 있는 첫 달을 “아빕월”이라고 부릅니다. 곡식이 싹을 틔운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이집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달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압제와 학대가 판을 쳤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 왔음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신약성경의 봄 역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더불어 찾아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발라놓은 어린 양의 피를 죽음의 사자가 건너뛰었듯이, 십자가위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 종살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 몸이 되었듯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죄로부터 해방되는 자유함을 누립니다. 겨우내 땅속에 묻혀 있던 씨가 새싹을 틔우듯이 이전 것이 지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처럼 계절의 봄 뿐만 아니라 신앙의 봄도 매년 맞이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부활절을 준비하는 사순절 한가운데 서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 안에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힘있게 임하길 기도합니다.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죄에 사로잡혀 있던 옛 것들로부터 해방될 새날과 새 시대를 기대합니다. 새봄에는 거짓과 폭력과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진리와 생명과 평화의 복음이 온 세상에 임하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봄을 마음껏 느끼고 싶습니다. 귀를 기울여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맞춰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습니다. 사순절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부활의 주님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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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용 목사/ SF 참빛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