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국에 계신 어르신께

2017-03-18 (토) 강미라/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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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자문위원 글마당

어르신, 여기 뉴욕에는 삼월인데도 눈보라가 쏟아졌습니다. 동장군이 떠나기를 영 주저하는 모양이지요. 뉴욕의 겨울이 매섭다고는 하나 어릴적 제가 자라난 대한민국의 추위만큼은 맹위를 떨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지낸 한국의 겨울은 참 추웠읍니다.

맹렬한 추위와 함께 보릿고개의 혹독함을 여전히 기억하고 계시는 어르신은 그 시절 가족의 생존을 책임지며 몸이 부서지도록 살아내셨죠. ‘잘살아보세’ 라는 노래는 어린 저도 따라 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근검절약, 근면 성실을 외치며 한등 끄기 등의 절약운동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신 덕분에 우리는 살아남았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었읍니다. 어르신들의 가치는 자식들을 잘 먹이는 것이었고 어르신들의 진리는 자식들을 잘 가르쳐 이 무지와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요. 그것만이 선이었고 정의였으며 진리였읍니다.

그러하니 어르신, 어르신께는 사회정의니 역사의식이니 운운하며 윗 일 하시는 분들에게 따지고 드는 저희들이 빨갱이가 무엇인지 모르는, 참으로 보릿고개가 뭔지도 모르는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철없는 젊은 것 들로 보이시지요. 이제 저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고 과정을 따지며 합법을 이야기 합니다. 어른들께는 강력한 생존의 다짐과도 같았던 “안 되면 되게 하라”라든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등의 구호를 이제는 저희는 부정합니다.


그래요. 저희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생존이상의 어떤 것, 말하자면 배부른 자들이 하는 어떤 정신적 가치 따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래서 어르신들이 붙잡고 의지하고 따라오셨던 주장들과 방식들을 이제는 굵어진 머리로 검증하려 들고 재단하려 드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쟁도, 가난도, 보릿고개도 모르는 주제에 말입니다.

저희는 정치가들이 잘못 하면 반발하기도 하고 때로 임명을 취소하기도 할 것입니다.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없는 토의와 쟁의를 거쳐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려 할 것이고 모두는 이것에 승복하는 것을 연습할 것입니다. 어르신께는 이것이 빨갱이의 무서움을 모른 채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허나 이 모든 노력이 어르신들의 지나온 삶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식들에게 살만한 세상을 물려주려 하셨던 그 절박한 사랑을 유산으로 받아, 방식은 조금 달라도, 우리 다음 세대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자 하는 동일한 노력임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는 모든 이들이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고 모든 일이 그 사회적 가치를 존중 받으며 흙수저 금수저 할 것 없이 동등한 기회와 가능성을 부여받는 그런 세상을 기대합니다. 가진 부와 명예에 따라 굴종을 강요하고 강요되지 않는 그런 세상, 사람의 가치가 그 사람됨으로 인정받는 그런 세상, 정의와 도덕에 기반 한, 상식과 헌법적 가치에 기반 한 그런 세상 말씀입니다.

지난 세월 척박한 삶을 살아내신 어르신의 희생과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월이 좀 더 지나고 노오란 개나리가 희망처럼 온 나라를 덮을 때 한번 찾아뵙겠읍니다. 모두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게 되는 그날 뵙겠습니다. 그때까지 강건하시고 평안하세요. 마음은 늘 고국에 가있는 젊은이 올림.

<강미라/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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