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이 있는 곳에 종교단체가 있고 그 중에 한인교회가 있다. 한인교회는 주로 한인들이 모이는 종족교회(Ethnic church)이고 이민역사와 더불어 교포들의 애환을 함께 하며 신앙과 삶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한인교회는 교포사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한인이 없는 곳에 한인교회가 있을 리 만무하다. 따라서, 한인교회는 지역사회와 보다 유기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신앙고백은 ‘구체적인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나타나야 한다. 교회는 내부소비 지향적인 단체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믿음의 공동체이다. 교회가 소위 게토(Ghetto)화 되면 건강함을 상실할 수 있다. 교회가 지역사회와 한인교포사회의 현안에 보다 민감하기를 소원해 본다. 신앙활동뿐 아니라 교민들의 의료, 자녀교육, 세무, 법률, 장애인, 이중문화, 연세 드신 어르신들에 대한 교회의 지속적인 관심이 요청된다.
교회공동체를 통하여 지역사회와 한인회를 향하여 신실한 섬김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교민들과 한인회 사이에서 가교역할과 소통을 위한 통로가 되면 좋겠다. 교포들의 고민과 관심이 무엇인지 늘 관심을 갖고 복음적 대안을 가지고 협력하고 섬겨야 한다.
작은 교회뿐만 아니라 자체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향하여 개방에 힘쓰면 좋겠다. 오직 자신의 교회, 우리 교인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한인회와 지역사회에 대한 “상보적 책임감”(Mutual accountability)을 가져야 할 것이다.
주일에는 크리스천들이 많은데 주중에는 크리스천들이 안 보인다고 한다.
예전으로 드리는 예배와 매일의 삶 가운데에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병행되어야 한다. 사실 한인공동체가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많지 않다. 교회가 좀 더 넉넉한 모습으로 교민과 지역사회를 위하여 개방하길 희망한다. 한국에도 교회본당의 강단부분을 커튼이나 가림 막으로 가리고 예비군 교육장으로 개방하는 교회들이 있다.
이러한 교회개방을 계기로 평생 처음 교회를 방문하는 이들도 있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된 어느 교회는 연간 80여명의 남성들이 새로 등록을 한다. 한인교회 중 큰 교회들이 작은 교회들과 서로 더욱 협력하고 지원하면 좋겠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 간에 예배와 행사에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 방문하는 분위기를 소망해 본다.
소위 각개 전투식, 개 교회주의, 교단 이기주의를 넘어서면 좋겠다. 내 교회만이 진짜, 순, 참된 복음이며 정통이 아니다. 어느 원로 신학자는 ‘정통, 정통하면 밥통이 된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교파 가지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니다. 대의와 명분이 빈약한 “분열을 통한 교회성장”이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이제 권위주의와 교권주의의 탈을 벗어버리자. 신자들의 귀한헌금은 목적성, 투명성, 신뢰성이 동반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은혜’,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으로 해석하여 구렁이 담 넘어 가듯 해서는 안 된다. 건강한 이웃교회, 타 교단 교회와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면 좋겠다. 성당이나 법당에 나가는 교포들,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들도 우리의 좋은 이웃이다.
나의 편견과 오만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교회만 아니라 한인사회도 함께 잘돼야 한다. 진정한 거룩함은 이 세상 안에 있다. 이제 그곳으로 내려가는 성육신(聖育身)의 겸비한 믿음이 필요하다. 봉사와 섬김이 없다면 통전적 신앙이 아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여 존재한다. 성경은 너희는 빛과 소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한다. 탄식과 절망이 있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안식처’가 되어야 한다. 자녀세대가 교회를 등지고, 이민을 오지 않은 상황에서 30년 후 한인교회의 쇠퇴를 예고하는 학자들이 있다. 권위주의적 교회운영, 신앙과 삶의 이중적 가치관은 다음세대에 추락을 가져올 수 있다.
교회는 우리들로 '희망을 지향하는 존재'(Sein zum hoffnung)로 살아가도록 격려해야 한다. 500년 전칭의(稱義)의 은총을 되새김질하며 대속의 십자가와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교회로 말미암아 한인사회가 더 행복해지는 그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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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일/예일대 신학대학원 방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