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간 여행

2017-02-24 (금)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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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네티컷 칼럼

어제부터 묵직한 잿빛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눈이 내려야 하는 계절에 이슬비가 내렸다. 겨울답지 않은 겨울이라고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다 말고 눈 폭풍에 갇혀 전기도 없이 답답하게 며칠을 보내야 했던 지난겨울이 생각나 불평을 거두기로 한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새로운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조바심치며 서둘러 TV를 깨웠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뉴스 채널에서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쏟아 내고 있었다.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하루에 하루를 더해도 내가 마주한 세상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줌에 이상한 안도감을 느낀다.

여행은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는 비상구였다. 여행이 쉬는 것이라 했지만 자신을 객관화하는 시간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결단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망설이다 떠난 혼자만의 여행에서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가끔씩 가 보아도 정겹고 익숙한 고향 땅에서 나 혼자만 허둥대는 이방인이 되어 있음을 느꼈다. 아마 그때부터 한국에 다녀오는 것이 '귀향'이 아닌 '방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세월만큼 멀리 떠나왔지만 고향땅에서는 여전히 소년으로 머물러 있었고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제는 퇴색해 흔적조차 알 수 없는 그 유년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을수록 내가 멀리 떠나 와 있음을 실감할 뿐이다. 이제와 생각하면 아이처럼 사는 것이 그 해답일지도 모르겠다. 화나는 것, 웃는 것, 놀라는 것 등등 그 충실했던 감정들이 이제는 낯설기까지 하다. 아이처럼 산다는 것, 앎과 행함의 차이는 이다지도 어렵다.

제자리로 돌아와 보니 나의 부재에 대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근히 작은 변화라도 있기를 기대했으나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어긋났다. 내 앞에 놓인 일상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들리는 나라 안팎의 이슈는 열흘 전과 똑같았다. 오히려 그 어긋난 예측에 마음이 놓이고 내 자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익숙함에 편안함을 느낀다. 늘 그만큼의 거리에서 위안과 격려를 받으면서도 또 그만큼의 거리로 떨어져 안도한다.

지난번 한 문인모임에서 들은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여행지가 아름다운 것은 시간의 제한성 때문이라고 했다. 일상을 여행지라고 생각한다면 매사가 아쉽고 놀라움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시공의 특정한 곳을 향한 여행이 아닌 내부의 공간 깊숙한 곳을 향하여 날마다 걷고 또 걸어서 어디인가로 떠나는 꿈을 꾸어야 할까보다. 다만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 갈 수 없다는 것이 일상에서 훌쩍 떠나 돌아오는 여행과 다른 점이겠지만 말이다.

루바토 (rubato) 라는 음악 용어가 있다. 작곡가가 지휘자나 연주자의 재량에 따라 일정의 선율을 박자나 템포에 구애받지 말고 아름답게 연주하라는 음악 용어라고 들었다. 루바토를 적용하여 연주 할 때에는 선율의 일정 부분의 박자를 당겼다면 나머지 부분은 늦추고, 반대로 늦추었다면 나머지 선율은 잡아 당겨 맞추어 가장 아름답고 안정적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당겨온 박자는 당겨온 만큼 그 템포를 되돌려 주어 균형을 맞추어 주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으며 어쩌면 우리의 삶도 템포 '루바토 (Rubato)' 와 같다고 생각했다. 앞서서 간다고 뿌듯해 하지도, 뒤쳐져서 간다고 불안할 것도 없는 나만의 방식, 나만의 자유로운 표현법으로 아름답게 연주하며 떠나는 여행을 꿈꾼다.

불협화음이 있어야 화음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고, 우여곡절 끝에 얻은 성취에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녹은 눈 사이로 나란히 고개를 내민 수선화가 눈부시다. 몸을 낮추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희망이다.

<최동선 전 커네티컷한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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