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리를 붙드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에게는 세상 일반인들에게서 볼 수 없는 뭔가가 강하게 풍긴다. 신봉하는 그 진리에 매료되어 있는 그의 인생이 매력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진리를 붙잡은 게 아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진리가 그를 붙잡고 있다. 진리라는 게 그 자체에 강한 장악력이 내재되어 있기에, 진리 그것에 포섭당한 인생은 거기서 도저히 헤어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모습이 만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도대체 거기에 뭐가 있어서 저 사람은 저럴까, 하는 그런 것.
그래선지, 진리에 매몰된 인생들은 매력적이면서도 대체로 ‘진실’하다. 진리는 영어의 ‘truth’로서 명사적 의미에 가깝다. 진실은 영어의 ‘true’ 또는 ‘real’인데, 이는 진리가 내뿜는 ‘참됨’을 지시하는 형용사적 의미다. 그에게 진리에서 우러나오는 이미지가 가득해보이니, 진리를 위해 살고 진리에 사로잡힌 그 인생은 당연히 아름답고 진실하지 않겠는가. 고귀한 명사를 향한 추구성이 이제 아름다운 형용사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난 요새 이 두 번째 것인 ‘진실성’을 더 많이 고민하고 있다. 목사로서 나는 입만 열면 진리를 외친다. 특히 ‘진리 중의 진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강단과 사석에서, 그리고 모든 만남의 자리에서 열심히 설파한다. 그 모습만 지켜본다면, 일견 난 ‘진리에 붙들린 사람’이자 ‘진실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질문은 이것이다. 난 과연 진실한 사람일까? 진리의 사람은 진실을 풍길 수밖에 없다는데, 난 입으로 진리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으니, 그래서 난 과연 진실한가? 답이 안 보인다. 정말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말이지….
이런 의문이 꼬리를 무는 것은 비단 설교자로서의 내 자신을 향한 성찰 때문만은 아니다. 요사이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 때문이다. 웬 거짓말을 그토록 잘들 하는지. 어쩜 이미 드러난 거짓들까지도 저토록 싹들 덮어버리려고 하는지. 저들에게 과연 진실이란 무엇일까? 진리 추구라는 고급스런 용어 적용까지도 갈 필요 없이, 그들은 사건의 진실성이나 삶의 진실함과 같은 인생 주제들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작금에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한 일들이 이런 회의에 찬 질문들에 성큼 더 다가서게 한다.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이순신 장군, 안중근 의사, 안창호 선생 같은 분들의 애국 치적을 들으며 감격해 눈물까지 흘리곤 했다. 물론 그런 것들마저도 한 통치자의 통치 보존을 위해 각색된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난 그때 이 조그만 나라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픈 매우 애국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서는 이런 유치한 애국심의 조각마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애국을 진리 삼아 진실하게 살았던 선친들의 만분의 일만 따랐더라도 이런 서글픈 일들은 안 생겼을 텐데 말이다.
예수님은 당시 종교의 센터였던 성전에서 난동을 피우며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전 가판대를 뒤엎고, 장사치들을 내쫒고, 46년에 걸쳐 지은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성경은 그분의 이런 문제적 행동을 놓고 이렇게 평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앞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분의 이 행동은 진리가 그분을 삼켜버렸기 때문에 나온 거였다.
예수님의 실례에서 보듯, 결국 누구에게나 붙들 수 있는 진리가 어떤 것인가가 중요하다. 가장 불쌍한 인생은 누굴까? 난 이렇게 생각한다. 붙들 수 있는 진리가 없는 사람. 아니, 붙들 수 있는 진리가 있어도 그게 진리인지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사람. 그런데 요즘의 세태에서는 이 불쌍한 인생들보다 더 불쌍한 이들이 있는 것 같다. 자기의 안신입명이 보수해야 할 진리라고 확고히 믿으며, 존재하는 진실마저 목숨 걸며 덮고 왜곡시키려는 자들이다. 진심으로 원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어떻게든 그런 이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근데 과연 그런 날이 오긴 할까? 난 올 거라고 믿는다. 왜? 그래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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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