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45대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취임했다. 2차대전 이후 소련과 겨루며 민주주의 정체의 수호신으로 자처해 온 미국, 건국 초기부터 대영제국의 억압적인 식민지 정책에 저항하며 부르주아 시민혁명의 신호탄을 올렸던 미국, 노예제도와 남북전쟁에 이어 Jim Crow 법에 기반한 남부의 인종차별이라는 오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1960년대 이후 민권운동을 통해 보다 통합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 온 탁월한 저력의 미국, 그 결실의 하나로 최초의 흑인 대통령 시대를 보낸 미국, 이제 그 미국의 백악관은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인물이 주인이 되었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탁월한 역사학자 중 한 명인 컬럼비아 대학의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는 미국의 정치 문화를 고찰하면서 그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었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을 지적한 바 있는데, 트럼프의 당선을 보며 필자는 선견자가 갈파한 미국 정치의 단면을 보는 듯 했다.
비록 비이성적이고 중우적인 타락을 막을 길이 없다 해도, 천민자본주의와 결탁하면 그 금권의 횡포가 가히 살인적이라 해도, 여전히 민주주의는 그나마 인간이 고안해 낸 정치제도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 국가에서 비롯되었다. 주전 5세기 초 페르시아의 두 차례에 걸친 그리스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사실을 많은 역사학자들은 동방의 전제적인 정치에 대한 서구의 민주주의의 승리로 파악하곤 한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페리클레스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정치의 꽃을 피웠고 철학, 예술, 문학이 만개했으니 전혀 근거무근의 자긍심만은 아니다.
그러나 20세 이상 성인 남자라면 모두가 민회원이 되어서 국정의 모든 부분(통상, 외교, 전쟁, 입법)을 결의하는 직접 민주주의 정치를 구가했던 바로 그 아테네에서조차도, 정작 민회원이 됐던 자유시민은 전 인구의 20%를 넘은 적이 없었다. 그들의 자유와 권리는 인구의 절반이 넘는 노예들과 아무런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외국인들의 노동과 생산을 기반으로 얻은 특권이었다. 지배민족만을 위한 민주주의(Herrenvolk Democracy)였던 것이다.
아테네 도시국가의 내부를 보면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이 되는 아크로폴리스(acropolis)라는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주변에 아고라(agora)라는 광장이 있는데 여기에서 민회가 소집됐다. 회기 이외의 아고라에서는 시민들의 공공생활, 상업활동이 이루어졌다. 큰 시장이 들어섰고, 그 시장 한 편에는 노예시장이 생겨났다. 역설적이게도 직접 민주주의라는 인류의 최대 유산 가운데 하나를 가능케 했던 경제적 원동력은 바로 이 참담한 노예시장인 셈이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3:13에서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exagorazo)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어원적으로 분해하면, ex는 무엇에서부터 끄집어 낸다는 의미를 지닌 접두어이고, zo는 어근 뒤에 붙어서 그 단어를 동사로 만드는 접미어이다. 그렇다면 어근은 agora, 즉 노예시장이 정기적으로 서는 이 광장을 말한다.
결국 바울이 사용한 이 상업용어를 빌자면, 구원이란 노예시장에 끌려와서 쇠고랑을 차고 온 몸이 벌거벗긴 채로 팔려갈 것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그 광장에서 빼낸 것이다. 그런데 단순히 호통으로 빼낸 것이 아니다.
똑 같은 속량이란 단어가 에베소서1:7에는 apoloutrosis로 사용되었는데, 그 어근이 되는 lytron이란 단어는 노예나 죄인을 되 사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을 의미한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피”가 그 몸값으로 지불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숨쉬다시피 하는 이 민주주의라는 정체의 오래된 원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처럼 뜻밖에도 그리스도의 속량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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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