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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던가

2017-01-05 (목)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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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지난 2016년은 다사다난했다. 난 공동목회의 새로운 실험의 장으로 들어섰고, 딸은 새 직장을 얻었으며, 아들은 대학 졸업 후 신학교에 입학했고, 그리고 어머니마저 아버지 뒤따라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린 해였다. 이를 거들기라도 하듯, 내 주변사회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미국대로 한국은 한국대로, 못난 정치인들 때문에 한 마디로 난리였다. 이 난리는 현재진행형이어서 총체적 국민 불안증은 좀처럼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주인공이 된 대통령이 남긴 한 마디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이 되었던가, 라는 그 말. ‘이러려고’는 주로 화자의 자괴감의 극치를 보여주는 수사법에 속한다. 결과론이지만, 그의 ‘이러려고’는 대통령으로서의 자기 나름의 환상에 못 미치는 작금의 현실적 상황에 대한 자괴적 핑계에 불과한 거였다.

이에 편승하여, 비슷한 어조로 나도 목사로서 이렇게 묻고 싶다.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던가? 목사 된 지도 벌써 20여 년이 흘러버린 이 지점에서 이런 자기상실적 변명을 내쏟는 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마는, 요즘의 교회들에서 비쳐지는 부정적인 모습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이 자조적인 질문을 안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 요즘의 교회들이 어때서?


요사이 나를 ‘열공’에 빠지게 하는 두 책이 있다. 케빈 밴후저의 <목회자란 무엇인가>와 존 파이퍼의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professionals)이 아닙니다>. 이 책들은 목사는 왜 목사로 부름 받았는가, 또 목사는 목회지에서 어떤 위치에 서있어야 하는가, 라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과 답변을 해준다. 제목부터 도전적이지 않는가? 목회자는 ‘전문직업인’이 아니다! 어쩌면 너무나 상식적인 명제에 대한 상식적인 답변인데도 이게 ‘도전적’이라면, 현대 목회자와 교회가 그 기본과 상식의 범주를 상당히 벗어나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해서, 이 ‘이러려고’가 내겐 오히려 목회적 본질을 향한 도전적인 수사법이 되고 말았다. 잘못된 ‘이러려고’는 버려야 할 것이고, 올바른 ‘이러려고’는 증강되어야 할 터이다. 그럼 난 지금 어떤 걸 택하고 있는 거지?

현대 교회들 안에는 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게 많다. 필요해서 도입을 했을 거면서도, 도입된 그것들이 단지 필요에 머물지 않고 절대적 기준으로 둔갑해버린다. 교회 정치와 제도들, 직분에 대한 정의와 실행, 그리고 제일 중하다는(?) 돈까지, 이런 게 다 그런 것들이다. 이들에 휩싸여 교회를 단지 유지(!)하는 목회는 결국 목회자와 교인들의 영혼의 성숙을 잠식시킨다. 혹시 내가 이런 것들에 매여 쩔쩔매고 있는 목회자라면, 내가 ‘이러려고’ 목회자가 되었는가라는 이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 된다. 비록 자조적이며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변(辯)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그 반대도 있다. 올바른 ‘이러려고’의 범주가 있다면 그것은 환영할 만한 것이리라. ‘열공 중’인 그 책들에서 말하는 목회적 본질들이 바로 그것이다.

교회 교부들이 고민했던 주제가 하나 있다. ‘아디아포라’ 논쟁이다. 이는 ‘불필요한 것들’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라는 뜻의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역할은 ‘더’ 또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덜’ 또는 ‘아주’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서 잘 추려내는 일이다. 이를 잘 못하면 교회와 목회는 엉뚱한 데로 간다. 반대로, 이를 잘해내면 교회와 목회는 올바른 길을 간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요즘의 교회들은 전자에 많이 가깝다.

신앙은 목적이지 도구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내 삶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교회는 변질의 길로 들어선다. 그런 거 있지 않는가? 구원의 은혜에 복받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하나로 이미, 충분하게 만족하는 그런 것 말이다. 교회와 예배는 그 길로 가야 한다. 구원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하나로 저 밑에서 치밀어 오르는 거침없는 행복감에 젖어드는 교회와 목회자여야 되지 않을까. 만약 나의 ‘이러려고’가 그런 거라면 난 목회자 된 데에 결코 후회가 없다. 그러나 내가 사역하는 교회가 ‘아디아포라’에 빠져 허덕이는 교회가 된다면, 나의 목회적 ‘이러려고’는 후회 속의 ‘이러려고’가 될 수 있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엔 어떤 목회자며 어떤 교회가 될 것인가? 어느 쪽의 ‘이러려고’를 취할 것인가? 목회자든, 평신도든 이 질문에 답하며 한 해를 출발했으면 한다.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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