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을 두고 “이스라엘 무협지”라고. 물론 하나님의구속의 역사와 계시의 말씀임을알 리 없는 사람이 농으로 한 말일 테지만 한 편 생각하면 그럴듯 하다. 히브리 성경이 전선지서(Former Prophets)라고 일컫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를죽 읽노라면 그야말로 중국의 영웅호걸 이야기를 방불케 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지난 9개월간 사울과 다윗의이야기가 교묘하게 교차되어 있는 사무엘상 전체를 강해했다. 영적으로 암흑과도 같은 사사시대 말기, 간절한 기도로 탄생한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 백성들의 요청으로 등극한 첫 왕 사울과 그의 불순종으로 인한 비참한 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로혜성과도 같이 등장하였으나 필설로 형용할 길 없는 모진 고생을 감내해 나가는 다윗. 이 책은왕국의 탄생, 제왕의 흥망성쇠,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열방의 각축, 그러나 이 모든 인생들의 부침(浮沈)을 완벽하게 지휘하시는야훼 하나님의 이야기를 장엄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이야기의 끝자락에 또한 번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은혜”다. 시글락에 본거지를 둔다윗과 그의 600명 군사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약탈 민족인 아말렉이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부녀자들을 모두 납치해 갔다.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찾아 모두섬멸하고 납치된 사람들을 다구출했으며, 게다가 무슨 보너스처럼 아말렉이 그간 노략한 물품을 전리품으로 얻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 가운데 200명이 계속된 강행군과 처자를 빼앗긴 슬픔에 기진맥진하여서 브솔시내에 머물렀고, 나머지 400명만이 토벌에 참여했는데 이들이들고 일어난 것이다. 낙오한 200명은 처자식만 돌려받아야지 전리품은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지당한 논리이다. 세상을 정의롭게 만드는 것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과, 논공행상(論功行賞)의 유효성이 아니던가? 단순히 돈과 시간을 투자하더라도 본전생각(?)이 나게 마련인데, 저들은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다윗은 똑같이 나누자고 그들을 타이른다.
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를제시한다. 전리품은 어느 누구의 업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삼상30:23)” 즉,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천 년 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께서 이 400명 군사들의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그의 비유 가운데서 완벽하게 재현하셨다. 그가 비유로 설명한 천국은품꾼을 고용한 포도원 주인과도같은데 문제는 이 주인이 동틀때부터 들어와 하루 종일 일한자들과 오후 5시에 들어와 1 시간 일한 자들에게 똑같이 1 데나리온씩 준 것이었다.“ 나중 온이 사람들을 하루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마20:12).” 새벽부터 일한 품꾼들은 분노한다.
예수는 지금 성과급, 급료, 손익배분을 말씀하시는 게 아니다.
사람들의 행위나 업적에 구애 받지 않는, 거부할 길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있다. 다윗도 이 은혜의 방정식을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윗은 그의 삶을 점철하고 있는것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한 없이 부어지는 은혜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정치, 경제, 학문, 예술 할것 없이 400명 용사들이나 새벽부터 들어온 품꾼들의 논리를 정의와 공평으로 평가한다.
서글픈 현실은 교회에서도 은혜가 종적을 감추고 성과와 업적이 키워드가 된 것 같다는 점이다. 더 서글픈 것은 성공적이고 화려하고 주목 받는 교회일수록 더 그렇다는 점이다.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의 필적할 바 없는 절대주권을 장대하게 펼쳐 보이는 사무엘상 말미에, 그가 사랑하시는다윗의 반응은 하나님의 은혜를 칭송하는 것이며 그 은혜를 반영하는 삶을 선택하는 모습임을 교회는 깊이 되돌아 보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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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석 목사(예담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