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고받는 열린 마음

2016-12-12 (월) 09:26:10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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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겁게 익어가는 가을 끝자락이 겨울의 문턱에서 만나는 시기다. 색 바랜 붉은 나뭇가지들이 잿빛 땅과 마주보는 겨울의 공원 속에서 두 사슴 가족들이 만나 옹기종기 모여 아침 식사 중이다.

사슴은 가족끼리 사이좋게 함께 다닌다. 주택가에 있는 제법 큰 공원이라 사슴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슴에게 먹이를 주지 말라는 공원당국의 표지판이 있지만 이른 아침이면 산책하는 사람들이 소량의 먹이를 놓고 간다. 큰 사슴, 아이 사슴 모두 예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모양이다.

인간 또한 추수 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가 오면 만남의 기회를 만든다. 가족, 친지들과 만나서 마음을 열고 주고받는 배려의 기회도 마련한다.


산책을 끝내고 서재 책상 앞에 앉는다. 가끔 매트로 기차의 정적 소리에 놀란 듯 라디오의 캐롤 소리가 흩어진다. 기차가 지나간 뒤 다시 은은히 들려오는 노래 소리는 빗겨난 생각을 되돌리기라도 하듯 나를 붙잡는다.

올해도 지난해처럼 오 핸리의 “현자의 선물(Gift of the Magi)”를 다시 읽어본다. 1900년 초 뉴욕의 가난한 젊은 부부의 크리스마스 선물 이야기는 할러데이 시즌을 맞아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오래 전 환자를 생각나게 한다.

결혼한 지 12년 쯤 심한 우울증을 알았던 중년 여자환자였다. 정신병원을 수차례 드나들게 되어 결국 남편한테 강제이혼을 당했다. 두 딸의 양육권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어렵게 우울증을 치료하고 난 뒤 세상 밑바닥에서 온갖 궂은일을 다했다. 어느 땐 끼니마저 넘기는 힘든 인생길을 걸어오며 가끔 장성한 딸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그들은 환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감수성이 강한 사춘기 시절 딸들은 어머니란 사람이 밥도 해주지 않고, 화장도 안한 채 집안에만 처박혀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쳤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환자는 언젠가는 두 딸을 만나리라는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환자는 두 딸의 전화를 받는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두 딸이 방문한다는 소식이었다.

환자는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이 간직하던 물건들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딸들에게 물려주겠다고 다짐했던 물건은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가 남겨준 중국제 찻잔과 시집올 때 가져온 예쁜 분첩이었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딸들과 만날 날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드디어 환자와 딸들이 만나는 순간 그만 서로 말문이 막혀버렸다. 무거운 침묵이 잠시 흐른 후 딸들은 “어머니가 좋아하실 것 같아 가져 왔어요” 하며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앨범이었다. 그 속에는 딸들이 어릴 때 재롱부리던 사진, 생일파티 중 활짝 웃는 모습, 유치원 때, 졸업식 때, 결혼식 때 그리고 아직 보지못한 손자 손녀의 모습도 들어있었다.

환자는 사진 한장 한장을 들여다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혼당할 때 가족사진 한장 가져오지 못했는데 사진을 보는 순간 잃어버린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딸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미웠고 싫었다. 어쩌다 친구들이 ??아올 때는 어머니를 골방 속의 미친 여자로 말해 주었다.

이제 자기들도 성인이 되어 자식을 키워 보니 어머니를 이해할 듯 싶었다. 그러나 쉽게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한번 상처를 입으면 다음에도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고 그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어머니의 눈물은 닫혀있던 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딸들은 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세 모녀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한동안 흐느꼈다.

인간은 될 수 있으면 속마음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마음 열기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닫고 있는 게 마음을 여는 것보다 더 힘들다. 일단 마음을 열면 복받쳤던 감정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고 나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이번 할러데이 시즌에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자. 껄끄러운 인간관계가 있으면 터놓고 이야기 해보자. 그게 우리 자신을 치유하는 것이니까.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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