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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어머니, 사랑합니다

2016-11-30 (수)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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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3일. 87세 일기로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신 날이다. 이어 거의 2년 8개월 후가 되는 2016년 10월 31일. 이 날은 어머니께서 아버지 곁으로 가신 날이다. 향년 86세. 이 글이 신문의 활자가 되는 날은 그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난 즈음이 될 것 같다.

열두 살 적 직계가족으로서는 처음 할머니의 장례를 경험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사남매의 막내였던 난 할머니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래서였는지 할머니와의 이별의 슬픔은 어린 내 가슴에 지워지기 힘든 멍을 남겨놓았다.

그 후 감사하게도, 오랜 동안 직계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은 없었다. 그리고는 이 두 개의 이별이 도착했다. 그러니까 40년 동안 내 영혼은 호강한 셈이다. 40년 간 죽음을 통한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이 가져다준 슬픔은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 긴 기간 동안 나도 모르는 불안에 휩싸였던 것 같다. 너무 평온하면 그 평온이 깨질까봐 하는 불안 같은 거였다.


하지만 불안이 현실로 되는 순간을 예측할 수만 있다면 불안의 강도는 약해지는 법이다. 다행히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예측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적당히 아프시다 돌아가셨다.

사실 큰 병 치른 걸로 하면 어머니가 더 먼저였다. 남 뒤지 않은 건강의 소유자였던 아버지는 사경 직전까지 간 수술을 하신 어머니를 간호하느라 많은 애를 쓰셨다. 그때였던 것 같다. 아, 안 되겠구나, 내가 먼저 가야해, 이런 확고한 마음을 가지셨다. 놀라웠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분이 허약해지기 시작하는데 마치 내리막길을 달리는 차와 같았다. 그리고는 2014년 3월 3일, 아버지는 드디어 본인의 ‘그 작정’의 열매를 맺으셨다. 그랬으니 자녀들은 그 기간에 아버지와의 이별을 충분히 예측하며 준비할 수가 있었다.

부모님은 형과 함께 시애틀에 사셨다. 우리 온 가족은 매년 8월이면 휴가를 내어 부모님을 뵈러 갔다. 그때마다 내년엔 부모님을 다시 뵐 수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헤어졌다. 혹시나 하며 그렇게 헤어졌으나, 역시나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그해 3월, 아버지의 장례를 다 치르고 혼자 남으신 어머니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어머니, 이제 장수하셔야 해요.” 어머니가 차디찬 시신으로 관 속에 눕는다는 걸 서럽다 못해 끔찍하게까지 여겼던 나로서 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으면 했다.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8월마다 더 볼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3년을 다 못 채운 2년 8개월 만에 나의 인사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훌쩍 떠나버리셨다.

그럼에도 역시 감사한 건 이것이다. 예측가능성. 어머니 자신도, 자녀들인 우리도 어머니의 죽음을 예측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것이다. 병치레로 아버지가 쓰시던 기저귀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놔두셨다. 나도 이거 쓸랑가 몰라. 안그랬으믄 좋겄는디, 누가 아냐? 그런데 단 한 개도 쓰시지 않고, 그 전 날 주일예배도 다 참석하시고, 평소 품고 사셨던 ‘심장 앓이’가 가져다준 순간적인 고통으로 급히 가신 것이다.

어머닌 분명코 그렇게 황급히 가실 거야, 심장 앓이가 그런 거 맞지? 그러니, 우리도 맘 준비하자, 이런 예측가능성, 우리 자녀들에게도 있었던 거였는데, 정말 그대로 다 되었다. 정말 감사하다. 결국 관 속에 누우신 어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많이 울 줄 알았다. 가슴이 먹먹타 못해 아예 먹물로 터져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잠깐의 서러움이 찾아오면서 일시적인 흐느낌은 있었으나, 자신의 죽음이 우리 자녀들만의 예측이 아닌 본인의 예측에도 스스로 응답한 거였음을 스스로 대견해 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시는 어머님을 보며 곧바로 안심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리움은 언제나 오래 남는 법. 한 달이 지난 지금도 어머니는 그립다. 서재 선반 위에 놓인 어머니의 활짝 웃으시는 영정 사진은 그리움을 더 사무치게 한다. 어머니는 고향 같은 존재이다. 내 영혼의 고향, 나의 어머니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는 지극히 평범했던 분, 여느 어머니들처럼 잔소리와 염려의 귀재였던 분, 그런데도 막내아들인 나를 포함한 네 자녀들과 모든 손주들에게 종교와 같았던 분, 바로 나의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 이젠 천국에서 뵈어야 할 것 같다. 나의 짧은 메시지를 어머니께 보낸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천국에서 뵈어요!”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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