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묵주(默珠) 팔찌

2016-11-12 (토) 12:00:00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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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중반을 넘어 팔찌가 하고 싶어졌다. 평생 반지나 시계도 거추장스러워 하지 않았는데, 얼마 전부터 팔찌란 게 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나이에 보석이 장식된 액세서리를 하기에는 멋쩍어 보이고 민망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 천주교에 다니는 분에게 지나가는 말로 묵주 팔찌를 얻을 수 있냐고 물었다. 물론 그 분은 내가 종교가 없다는 것도, 종교를 갖지 않을 사람이란 것도 안다. 그냥 한 말이라 이 일은 한참을 잊고 지냈는데 몇 달 후, 그 분이 묵주를 구해다 주셨다. 그래서 그 묵주 팔찌를 여름 내내 하고 다녔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님이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쇼를 할 때, 염주를 액세서리로 사용해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염주 팔찌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묵주 팔찌를 액세서리로 택한 것은 천주교에 대한 오랜 호감 때문이다. ‘목민심서’를 쓴 다산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다는 것을 어렸을 때 배웠다. 18세기 전후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를 해소하려는 개혁을 향한 열정과,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백성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정약용을 존경하기에 천주교에 맨 처음 호감을 가졌다.


그 후로 군사 독재 정권에 방패막이기가 되어 주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지학순 주교님이 좋았다. 김대중 대통령을 좋아하는데 이분도 천주교 신자였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을 좋아했고, 가수 송창식 씨를 좋아하는데 이분들 역시 천주교 신자다. 하여튼 공교롭게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여서 가톨릭에 대한 정서적 호감은 뿌리가 깊다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불평등은 사회악의 근원이라 말씀하시며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친근한 벗으로 다가오신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면, 자꾸만 정약용이 떠올라 기분이 흐뭇해지곤 했다.

그래서 염주가 아닌 묵주를 액세서리로 택했다. 유학생처럼 왜 믿지도 않으면서 종교적 상징물인 묵주 팔찌를 하고 다니냐고 따진다면 논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절대적 진리만 있을 뿐 상대적 진리는 있을 수 없다는 그와 어떤 논쟁을 해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종교는 믿는 자만의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종교가 없더라도 종교의 영향에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집 만해도 큰누님. 작은 누님은 ‘반야심경’을 입에 달고 사는 불자시고, 아들 녀석은 미션스쿨을 졸업했다. 무엇보다도 아내는 성경을 일곱 번 정독할 정도로 믿음 깊은 개신교 신자다. 다행인 것은 그녀가 유일신론자가 아니고 범신론자이기에 나와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는 삶의 일부이고 문화이기 때문에, 그것은 믿는 거와 별개로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교회를 안다녀도 크리스마스 때는 많은 사람들이 성탄절 카드를 보낸다. 믿음과 상관없는 문화적 행위일 뿐이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란 단언에 동의할지라도, 삶에서 종교나 신은 부정할 수 없는 실체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갖고 신을 믿는데 이를 무슨 수로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

종교의 기원은 인간의 불안 심리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불안하니까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고 위안을 받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종교는 존속될 것이라 한다.

인간은 불완전(부조리)하고 우리 삶은 불확실하니까 모든 걸 신에 맡기고 의지해야 한다고 성직자들은 설교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신을 믿는다고 하여 인간의 불완전함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며 삶의 불확실성이 해결되는 것 또한 하나도 없다.

실존주의가 말하는 인간의 “부조리”한 존재와 삶의 “불확실성”을 내면화시킨다면, 우리는 종교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운명에 조금은 의연하지 않을까.

묵주 팔찌가 좋다. 쇠붙이가 아니고 나무라서 더욱 좋다. 화려하지 않아서 좋다. 황금 팔찌를 했다면 아무렇게 행동을 해도 되겠지만 묵주 팔찌를 하고선 함부로 행동할 수 없지 않은가. 신을 믿지 않지만 종교적 상징물이 주는 구속 자체가 나를 경계하도록 하기에 더욱 좋다.

<김완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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