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동안의 더위가 한 여름 못지않았던 가을의 길목, 나는 세계작가대회에 참석해 경주 화백 컨벤션 센터에서 문학 강연을 듣고 있었다.
잠시 바람을 쐬고 싶어 살며시 밖으로 빠져나와 파킹장이 보이는 의자를 찾아 앉았을 때, 어떤 초로의 남자가 혼자 그곳에 앉아 있었다. 초면이긴 하나 같은 문인이 나란히 앉게 되자 그 남자가 미국에서 오셨느냐고 먼저 정중하게 말을 건네 왔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그는 자기 딸이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 그러세요? 저도 중앙대학교를 나왔는데요.”그러자 갑자기 그 남자가 반색을 하며 자기도 중앙대학교를 나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대화가 그렇게 진행되자 우리는 몇 기 졸업생인가를 따졌고 같은 동기임을 확인한 바로 그 순간 ‘야, 너 누구 아니니? 나 누구야’하고는 어머머머 감탄사를 연발하며 먼 향수 같은 감동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중히 말이 오가던 초로의 남녀가 동창생임을 확인한 후, 지난 50년의 세월이 없었던 양 우리는 옛날의 금잔디 동산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너무 오랜 세월 잊어버린 얼굴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도 그 동안 잠자던 우정이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감동이 마음을 찡하게 했다.
행사기간 내내 우리는 하고픈 얘기가 너무 많아 막간을 이용해 짬짬이 만나 우리 생애에 가장 아름다웠던 대학시절의 기억 속에서 온갖 이야기들을 뽑아내서 박장대소 하며 즐거워했고, 세상을 등진 친구, 병마와 싸우는 친구, 치매로 자신을 잃어가는 친구, 거듭 반복된 사업 실패로 빈 털털이가 된 외로운 친구 등등 아픈 사연을 가진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는 가난과 질병, 외로움에 휩싸인 황혼의 쓸쓸함에 우수에 잠기기도 했다.
친구가 전해 주는 소식들을 들으며 형태 있는 모든 생명은 퇴색하고 스러져 조락함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행사가 끝나면서 친구와의 짧은 만남도 끝이 났다. 마음을 털어놓고 지난 학창시절 얘기를 실컷 나눌 수 있었던 옛 동창생 친구가 그냥 좋았고 살아있음에 대한 깊은 감동과 감사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친구라는 별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 기쁨이고 행운이다.
낡고 오래된 앨범을 펼쳐 들여다 본다. 사각모를 쓴 풋풋한 청춘남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인생에 젊음의 저축은 없지 않은가. 세월에 밀려 우리들의 젊음은 물거품처럼 사라졌어도 세월이 남긴 흔적들을 훈장처럼 달고 여기까지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동창 친구들의 빛나는 황혼길 인생에 하늘의 축복을 기원한다.
마음과 마음에 얽힘이 있는 우정의 따뜻한 교류는 하루하루를 훈훈하게 또 탄력 있게 해준다. 이 가을, 나는 그런 우정을 키워가는 마음의 기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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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중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