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9월의 비’

2016-09-20 (화) 08: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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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묵(문학과 비평 등단)

4월에 비를 맞으며
이 하이웨이를 지나곤 할 때
나는 길가의 집들을 알지 못했다
하루아침 햇빛은 퍼붓듯 쏟아지고
연두빛 유니폼을 입고 늘어선 나무들
민들레꽃은 밤새 황금 카펫을 깔아놓아
나는 그 위로 세상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같은 길을 따라
오늘 내가 집을 향할 때
9월 하순의 어스름이 길에 깔리고
문득 불을 켜는 길가의 아파트들
거긴 들어갈 수 없는
아무리 오가도 스쳐만 가야 하는 성벽
낯선 길 이대로 달리면
하늘과 땅이 맞붙은 저 끝 어디
불 꺼진 마을에 닿을 수 있을까
표지판 없이도 훤한 동네
비 그친 골목에 들어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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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생애가 떠오른다. 그는 4월의 풀밭처럼 촉촉하던 시절을 지나 꽃들의 황금 카펫 같은 청춘을 지나, 쓸쓸한 가을의 시간에 이르렀다. 환하게 반겨주던 꽃들 대신, 눈앞에 다가오는 것은 천천히 불을 켜는 아파트의 낯선 창문들뿐이다. 하이웨이를 달리며 표지판 없이도 환한 상상의 마을에 이르는 환몽에 잠기는 그는 가을의 사람이다. 한 생애를 다 태우고 난 드넓은 들판의 사람이다. 열망 그치고, 폭풍 그치고, 싸움도 그친 그곳, 세상의 쓸쓸한 평온을 품는, 첫 가을의 커다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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