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잔치집 보다는 초상집!’

2016-08-29 (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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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달 사이에 3번이나 장례식에 다녀왔다. 관속의 고인들은 순진무구한 표정이다. 유모차 안에서 포대기에 싸여 잠든 아이와 같다. 영원히 잠든 모습이 아니다. 잠시 꿈꾸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곁에서 목 놓아 우는데 한마디 말이 없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모습 그대로 모든 이들과 이별을 하고 있다. 사는 동안 많은 죽음을 지켜봤다. 그래도 죽음은 언제나 낯설다.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한 번도 죽어보지 않았기에, 죽음이 궁금하다. 죽어갈 때 느낌은 어떨까? 어떻게 영혼은 빠져 나갈까? 사랑하는 가족을 영영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낯설다. 사랑하는 이들이 남겨진 자로서 겪어야할 슬픔을 생각하면 겁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명언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다. 사람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죽음이라더니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우리가 보통 접하는 장례절차 이름은 여럿이다. 발인이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상여가 집을 떠나는 상례의 절차다. 영결이란 사람이 죽어 헤어진다는 의미다. 또는 영영 이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장례란 고인의 육신을 안장하는 절차다. 성경적 표현은 환송예배다. 환송이란 어디론가 잘 보내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믿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다. 그래서 환송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여하튼, 장례는 고인을 진심으로 추모하는 의식인 셈이다.


매번 장례식에 다녀올 때면 아쉬움이 남는다. 이곳에는 고국과 달리 빈소를 차려놓고 문상을 받는 관례가 없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장례식장의 출입이 제한된다. 가족들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아무 때나 찾아가 고인에게 추모의 정을 표현하는 건 불가다. 물론, 장례식 후 별도의 식당이 마련된다. 그래도 유족들을 위로할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언제나 발길을 돌릴 때는 ‘뒤늦은 후회’에 가슴이 먹먹한 이유다.
장례식에 참석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현실감이다. ‘아, 그분도 가시는구나!’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란 것을 실감한다. 남의 일이자 바로 나의 일임도 깨닫는다. 고인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존재다. 그래도 가끔 함께했던 장소에 있노라면 여전히 이상한 느낌이다. 금방이라도 말을 건네며 다가올 것 같다.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 허전하고 허망할 따름이다. 한 세상 살고 떠나는 것이야 정해진 이치임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장례식에 갈 때마다 인생의 허무함을 알게 된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음도 재확인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사는 삶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죽음을 앞에 두고서는 대충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얻은 결론은 열심히 사는 것은 잘 죽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죽는 것을 잊고 사는 사람과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한다. 인생의 종말을 모르고 사른 사람들의 삶은 나태하고 방종하며 무책임 할 수밖에 없다고 단정한다. 이와 달리, 인생의 종말을 알고 사는 사람은 책임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때문에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은 경건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고 후회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비결은 스스로의 죽음을 기억하고 책임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는 교훈을 가슴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인생무상을 새롭게 느끼게 된다. 언제나 남의 일 같이만 느껴지는 죽음은 언제 내 앞에 닥쳐올지 모른다. 이처럼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때문에 허망한 길을 속절없이 보내지 않도록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한 사람의 평가는 관 뚜껑을 덮기 전에는 할 수 없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장례식 때 눈물 흘려 줄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만들어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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