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7일 사무실로 큰 소포가 배달되어왔다. 영어 이름의 스펠링이 달라 한국어를 모르는 비서가 “우리 회사에 이런 사람은 없는데 어떻게 할까요?”하며 묻기에 옆에 적힌 한국이름을 보니 내 것이었다. 한국 국가 보훈청장이 LA 총영사관을 통해서 보내온 것이다.
뜯어보니 나에게 ‘국가 호국영웅’이란 증서와 인사편지 그리고 목에 거는 큰 훈장이 들어 있었다. 뜻밖의 일이라 66년 전을 회상하며 “이제 와서 나를 알아주다니” 하며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금하기 어려웠다.
며칠 전 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에서 친해진 두 사람의 미군 참전용사들에게 6.25 전쟁 66주년 기념이라며 좋은 미국식당에 데려가 점심대접을 했었다. 한 사람은 미 해병대 하사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했다하며 또 한 사람은 육군 항공대에 있었다 한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10대의 학생으로 병역의무가 없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이를 두 살이나 올려서 당시의 유행어였던 ‘소모품 소위’로 보병 수도사단 최전방에서 매일 죽고 죽이고 뺏고 뺏기는 전쟁을 했다. 적에게 포위되어 하룻밤만 전투를 하고나면 산 전체가 아군과 적군의 시체로 덮였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주먹밥을 들고 뛰어오던 병사가 죽어 며칠씩 먹을 것이 없을 때는 풀이고 나무뿌리고 할 것 없이 아무 것이나 뜯어먹으며 견뎠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개월씩 이런 전투를 하다보면 다 찢어진 피투성이 군복에 적탄에 맞아 구멍 뚫린 철모, 상처투성이의 몸, 몇 발 안 남은 총알과 수류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1952년 어느 날 우리 수도사단 전체가 적에게 완전 포위당했었다. 적의 폭격으로 유선, 무선통신이 다 끊기고 육박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왕에 죽을 텐데’하는 생각에 아끼고 안 먹던 물통을 사병들에게 내주며 “한 모금씩 마시라”고 했는데 그들은 입만 적시고는 나에게 “소위님” 하며 돌려주는 것이었다.
이 전투 후 생존한 장병들이 의정부에서 재집결하는데 한국의 대통령이나 국방장관 또는 육군참모총장은 안 왔지만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우리를 위로 차 찾아와서 함께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전쟁이 끝나고 제대할 때 퇴직선물이라고는 광목 한마가 전부였다. 전쟁 후 1957년 나는 시험을 거쳐 한국조폐공사에 입사했다. 신문광고의 응모자격은 “공대 졸업자로서 병역필자” 라고 했었는데 입사하고 보니 14명 중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도 있고, 4명 이외는 전부가 병역기피자들이었다. 이런 부정부패를 불평했다는 죄로 나에게 ‘병역 기피자’라는 누명을 씌워 파면을 시켰었다. 나는 군대에 가서 그냥 썩은 것도 아니고 위기에 빠진 한국을 위해서 최전방에서 전투를 한 애국자였는데….
이제 와서 ‘국가 호국영웅’이라니? 지금이라도 나에게 잘못했었다는 말 한마디 해주면 기쁜 마음으로 눈을 감을 수 있겠다.
모두 지나간 옛날 얘기들이다. 지금이나마 나에게 ‘국가 호국영웅’이라는 칭호를 준 한국정부에 감사하며 오늘날의 한국정부는 옛날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군뿐 아니라 전 세계의 16개국에서 우리나라를 위하여 참전해준 장병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의를 표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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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희 공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