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피아성전은 서기 537년 건립된 비찬틴시대 대표적 건축물
▶ 터키는 영적 불모지. 척박한 곳서 믿음 지킨 일꾼들의 숨결느껴
이스탄불시내 소피아성전: 본래 교회건물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어 4개의 탑(minaret)을 교회 주변에 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이 탑에서 하루 5번 이슬람교도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려준다.
그리이스 여행을 마치고 터키 국경을 다시 넘은 우리는 새로운 버스로 갈아타고 본래 우리 여행의 출발지 였던 이스탄불로 향했다. 유럽에서 가장 심하다는 이스탄불의 교통체증을 겨우 뚫고 처음 도착한 날 시간이 늦어 관람할 수 없어서 아쉬어 했던 소피아 성전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그리스어로 ‘거룩한 지혜’라는 뜻을 가진 소피아 성전 (Hagia Sophia)은 어쩌면 지금부터 과거 1,500년간 터키 땅의 기독교 교회가 어떤 역사를 거쳐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단서처럼 보였다.
원래 이 자리에는 소피아 성전 이전에 두 번이나 교회가 세워져 있었으나 불에 타 없어졌고, 터키의 수많은 유적지 중에서 1년 방문객이 300만이 넘어 가장 인기 있는 방문지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서기 537년 동로마 혹은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건립된 정교회의 대성당으로 비잔틴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인정받는다. 그 후 약 1,000년 동안 이 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방 정교회의 모교회로서 쓰임을 받는다. 1453년 오스만터키 왕조로 이 지역이 넘어가면서 소피아성전은 이슬람사원으로 바뀌어 1931년까지 무슬림들의 예배처로 사용되다가 지난 85년간은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져 왔다고 한다.
소피아 성전이 이슬람 사원으로 바뀔 즈음에는 교회건물은 이미 낡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교회가 갖는 역사적 상징성에 주목한 오스만 지배층은 교회의 종탑, 제단, 유물, 벽면에 그려진 성화 등을 제거했다.
특히 화려한 예수님, 마리아, 성인들의 성화 위에는 회칠을 하는 식으로 기독교의 흔적을 없애려 하였다. 또 여기에 이슬람 종탑 (minaret) 등 여러 구조물을 교회 안 밖에 세워 지금까지도 변형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소피아 성전을 둘러보면서 한편으로는 비잔틴시대 기독교 건축양식의 웅장함과 섬세함에 놀라고 감탄했지만, 왠지 가슴이 무겁고 우울했던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별히 회칠한 벽을 일부 벗겨내 볼 수는 있었으나 심하게 훼손된 성화들을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성전을 나오다가 성전입구 땅 바닥 한구석에 팽개쳐 놓은 듯 바위조각 하나에 주목을 하는데 그 위 어린양들의 무늬가 예수님의 열두제자들을 상징하며 그 돌 조각이 서기 415년에 세워졌던 두 번째 성전 현관의 일부라는 작은 표지판을 읽고 나는 한 동안 그 곳에 서서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결국 이게 오늘 터키의 기독교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터키는 분명 영적 불모지다. 비록 헌법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국민의 99퍼센트가 이슬람교도인 상황에서 기독교 선교의 노력은 쉽지 않다. 그러기에 더욱 우리는 무너진 교회 터들을 방문하면서 여기저기에 뒹구는 바위 덩어리 기둥 틈을 살피며 간혹 눈에 띄는 십자가, 교회의 작은 흔적 하나에 반가와 하며, 수백 년 전 오늘 보다 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위해 헌신한 하나님의 일꾼들의 숨결을 느껴보려 한 것이다.
소피아 성전내부를 배경으로 한 상항 한국인연합감리 교회 송계영목사(왼쪽부터)와 계용식 장로부부등 교우들
요즘 미국에서 사람들의 종교적 성향을 표시하는 단어 중에 “Nones”이란 단어가 있다. 설문조사에서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사람 특히 30대 이하의 젊은 층은 세 명 중 한 사람이 “Nones” 즉 아무 종교나 교단에 자신이 속해 있지 않다고 응답한다고 한다. 이들 중 대부분이 어려서 교회를 다녀본 경험이 있고 기독교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들이지만 이제 성인이 되어 자신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는 얘기다.
놀라운 것은 이들 중 상당수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이들이 기성 교회에 선뜻 발을 들여 놓기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가 교회가 너무 이기적이며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가 말로는 이웃 사랑을 외치지만 실상은 교회가 자신 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동시에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갖게 되면 이들을 교회가 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Nones의 숫자는 미국뿐 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 사회에서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가 신흥종교나 유사종교 혹은 아예 무종교의 길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예수님이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을 앞에서 성전을 가리키며 그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하신 경고는 그냥 경고가 아니었다. 서기 70년 젤롯파들이 성전을 자신들의 정치적 거점으로 삼아 로마군을 향해 전쟁을 벌이다가 로마군인들이 쏜 불화살에 예루살렘 성전은 잿더미가 되면서 위의 경고가 사실로 이뤄지게 되어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셨고 (요한2:19-21), 무너진 자신의 몸을 삼일 만에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고 하시며 자신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 믿음 위에 참 “교회를 세우신다”(마16:16, 18)고 하셨다. 바울에게서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 아니다.
성령이 거하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고전 3:16)이라고 하면서, 바울은 어디를 가나 교회의 외형이 아닌 내면, 특별히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면서 어디를 가나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며 그 공동체들을 견고케 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바울이 이렇게 노력을 다해 세운 초기 기독교의 거점인 터키의 교회들이 오늘날 자취를 감추어 그 외형이 초라한 돌 무더기 잔재로만 남게 된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간 계속된 지진이나 전쟁의 영향도 있었고, 세계대전 후 열강들의 정치적인 담합으로 그 지역 기독교인들을 타 지역으로 이주시킨 영향도 있다.
문제는 이 지역을, 아니 단순히 터키뿐만이 아닌 오늘날 세속화의 물결로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어 교회가 점점 힘을 잃고 있는, 한국을 포함한 모든 선진국 땅에 어떻게 다시 복음을 회복하느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독일신학자 본훼퍼는 20세기 중반 이미 세속화된 독일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격감하는 것을 보면서 교회가 세상에서 신임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로 자신을 비우고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는 바로 전적으로 헌신적인 믿음 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여하신 가난한자 소외된자 이방인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교회의 상이다.
이는 주님이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섬김의 종이 되시기 위해 오신 것 처럼 (빌 2:7-8), 오늘의 우리 교회가 진정 주님의 몸으로 이 땅에 거듭 태어나는 길이기도 하다. 이런 헌신과 섬김의 도를 교회의 기본 존재양식으로 삼고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자신의 몸과 삶 전체를 남을 위해 내어 주는 믿음과 섬김의 공동체, 희생의 공동체, 즉 내면이 충실한 건강한 교회상을 이룰 수만 있다면, 터키이던 아니면 미국 땅이든 무너진 터 위에 황량하게 버려져 뒹구는 돌판 위에서나 보일까 말까하는 교회 십자가 흔적은 분명 앞으로 생명력을 회복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울리고 당기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으로 일어 설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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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일 목사 / 버클리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버클리 새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