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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열심히 공부하세: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

2016-08-03 (수) 이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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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둘째 아들이 갓 세 살을 넘겼을 때 일이다. 녀석과 나는 따뜻한 봄 볕에 신학교 기숙사 앞 언덕바지에 연한 계단에 앉아 있었다.

녀석은 자기 손 등에 앉아 두려운 줄도 모르고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던 무당벌레와 한참을 놀더니만, 이윽고 날아가 버린 벌레가 아련히 사라질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보고 물었다.

“아빠, ladybugs(무당벌레)는 다 girls야?” 정확하게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다만 세 살 바기 아이가 벌레의 이름을 가지고 유추해 낸 나름의 결론이 제법 그럴듯하고 다소 기발한 탓에 애 엄마에게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만이 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계시된 그의 말씀을 통하여 무언가를 깨달아가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9:23-24).” 지혜와 용맹과 부함, 어쩌면 우리네 삶이 분주하게 따르고 좇는 것들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며 비인간적인 교육 현실 속에서 문자 그대로 맞아 가며 미친 듯이 공부해 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성적 순으로 사람의 가치를 계량화하는 몰지각한 교육 환경을 개탄했으면서도, 똑 같은 세계관을 자녀들에게 여전히 대물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헌데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를 알아라. 내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여호와임을 깨달아 알아라.”

아이는 왜 벌레의 이름에 들어 있는 특정 성을 지칭하는 단어를 근거로 그 종이 모두 암컷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을까? 물론 대단히 사랑스럽고 깜찍한 발상이긴 하지만. 세 살 아이는 뇌의 용량도, 주어진 정보를 처리할 능력도 어른과는 현저하게 다르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만 흐르고 신체만 발달하면 정보 처리 능력과 논리적 사고 능력이 함께 늘어날까? 아이는 반드시 학습을 해야만 한다.

Lady란 단어는 그 벌레가 보여주는 화려한 색상과 무늬를 특징적으로 표현한 현상학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생물은 암수가 있고 그 생식적인 결합이 있어야만 번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부분적인 특징을 전체에 적용하는 것은 일반화의 오류라는 논리학적 원리도 배워야만 한다. 배우고, 사고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틀린 것을 질정하는 과정을 겪지 않고는 깨달을 방법이 없다.

강해설교를 고집하다 보면 찬성도 있지만 반대 의견도 마주치곤 한다. 그렇게 전문적인 것까지 알아야 하나? 본문에 대한 주해(보통 주일 설교의 70% 분량)가 그렇게까지 많아야 하나? 성도들의 수준을 너무 높게 잡은 건 아닌가? 간단히 대답하면, 하나님 말씀을 알아 가는데 전문가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없고, 70% 분량은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지난 수 백 년간 검증 받아 온 강해설교의 정석이며, 성도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대단히 높다.

오히려 그간 현란하기 그지 없는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과, 섬김을 통해 영성을 키운다는 천박한 슬로건으로 정작 말씀을 깨달아가는 일에는 소홀함이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의 잠재능력이 사장되어 왔다. 그리고 내가 철석같이 믿는 것이 있다. 이렇게 무한한 성경의 세계, 그것이 쓰여진 언어의 오묘함과 정교함, 하나님의 구속사가 진행되는 역사, 성경 인물들의 특성을 학습하고 배워 나가는 것이 5년 혹은 10년 쌓인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아이가 현상학을, 생물학을, 논리학을 배워 나가는 과정과 사뭇 흡사하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가 이끄시는 역사를 깨달아 안다는 것은, 어느 날 강력한 영에 사로 잡혀 전기가 쫙 흐르듯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배워야 한다. 깊이 상고하고 되새겨야 한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이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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