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람다운 사람 이야기

2016-06-25 (토) 정정숙 전직 공립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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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빛바래지 않고 삶의 길목에서 자주 떠오르는 분들이 계시다. 이 세상 저 세상 둘러보다 결혼을 했을 때는 내 나이에서 스물 자는 아예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선머슴 같기만 했던 나는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어도 어디 살림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겁이 난 어머니가 가정부를 두어 주셔서 2년 정도는 살림 솜씨 들통 나지 않고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가정부 구하기도 힘들고 같이 살던 시어머니도 따로 사시게 되니 우선 김치 담그는 일이 큰일이었다. 배추를 기세 좋게 소금물에 절였는데 도통 언제쯤 꺼내 씻어 고추가루 뿌리고 양념 넣어 버무리는지 알 수가 없어 수돗가의 배추가 근심 덩어리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알량한 새댁 살림솜씨 작은 동네에서 들통이 나지 않게 하려고 절인 배추 선 보아줄 만한 사람 물색하느라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다.

그러다 결국 찾아낸 분이 옆집으로 새로 이사와 수인사만 겨우 나눈 50대 후반의 아주머니. 살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나는 그 때부터 새앙쥐 살강 드나들 듯 아주머니 집을 드나들었다. 여러 딸들과 손자 뒤치닥거리, 까다로운 남편과 자신의 형님마저 모시고 사는 어려운 입장이었지만 한 번도 싫어하는 내색 없이 "어서 오우."라는 반가운 인사로 맞아주었다.


아주머니와 단짝이 되어 경동 시장을 따라다니며 철따라 골고루 오이지, 오이소백이, 마늘장아찌, 고추 절임, 오이지, 꼴뚜기젓 동치미도 똑같이 담가 맛을 비교해 가며 같은 음식이라도 나누며 즐거워했다.

처음 배우는 입장이라 온 정성을 다해서였을까? 때에 따라서는 내 음식 맛이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난 아주머니 음식보다 더 감칠맛이 있어 살림 사는 재미를 더해주고 있었다. 꽃을 무척 좋아하는 아주머니 따라 열 평 남짓한 마당에 목련과 장미, 찔레를 심고 고추, 상추, 돗나물도 길러 자급자족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신나하는 일은 장독대를 쌓거나 부엌 타일을 바르는 일이었다. 물론 다 아주머니에게서 수습생으로 배운 덕이었다.
첫 애를 낳고는 40일 친정 가서 구완하고 와 가지고 대뜸 이 일에 달려들어 쪼그리고 앉아 부엌 바닥에 타일을 붙이느라 발목이 아파져서 내가 인부 사지 않고 절약한 돈보다 엄마가 지어준 한약 값이 더 들었다. 엄마는 가난한 동네로 이사 가더니 별 걸 다 배워서 한다고 언짢아 하셨지만 나는 그 일이 정말 재미있었는 걸 어쩌랴.
첫아기를 가졌던 겨울은 식구 단촐한 데 김장할 것 무에 있느냐고 당신이 우리 생각하고 넉넉히 담았다며 겨우내 먹을 김치를 따로 독에 담아 아예 땅에 묻어주고 갔다. 두 집이 똑같은 연립주택이라 이어진 담을 새로 싸아 바를 때도 반부담을 하려니 마음을 상해하는 것 같아 큰 친절을 받아들였다.

아주머니를 내가 깊이 존경하며 기리는 것은 꼭 내게 잘해 주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작 그분이 훌륭한 점은, 또 내가 더 못잊어 하는 것은 그 분이 수레를 끌고 다니는 장사꾼들에게 아주 친절하였기 때문이다. 과일은 조금씩 상한 것을 골라 샀고 달걀도 깨진 것을 먼저 골랐다. 금방 먹을 것이니 일 없다며. 그것도 모자라 가끔 거리를 돌며 장사하는 분들을 집으로 불러 식사를 대접하곤 했다. 그 아주머니 집은 말할 수 없이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는데 그분들의 남루함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나는 내가 아주머니 연세에 이르면 나도 그렇게 저절로 너그럽고 푸근해지는 줄 알았다. 나도 그렇게 거인이 돼가는 줄 알았다. 그리고 사는 동안 이런 훌륭한 어른을 많이 만나게 되는 줄 알았다.

미국에 와서 꼭 한 번 소식 주고받고 그분이 이사를 하면서 그만 소식이 끊겼다. 꽃이 많이 피는 동네에서 봄을 맞으니 꽃을 유독 사랑하던 그 분 생각이 새롭다.

<정정숙 전직 공립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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