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픈 날’

2016-06-16 (목) 10: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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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경희(시와 세계 등단)

그는 첫 번째 호흡과 마지막 호흡 사이에 왔다
나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수로가 얼마나 긴지 수량이 얼마나 되는지
유속이 어떤지 간이역은 어디쯤에 있는지
기차는 언제쯤 멈추는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내란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조차도
알 수가 없다
가만히 앉아서 숨소리를 들어볼 뿐
그는 아마 작별 인사도 없이
나를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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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호흡과 마지막 호흡 사이, 그러니까 살아있는 동안의 날들이 다름 아닌 아픈 날들이다. 이름도 모르는 그가 우리에게 와서 일생을 함께 머문다. 잠복된 그리움이나 두려움, 강처럼 기차처럼 혹은 내란이나 음모처럼 우리 안에 산다. 언젠가 그는 마지막 호흡과 함께 우리를 떠나가리라. 물론 작별의 인사도 없이. 허무하다. 하지만 허무가 허무하지 않게 들리는 것은, 아픈 날의 속내에 가득이 물결치는 생의 생생한 숨소리 때문이리라.
임혜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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