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화‘곡성’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2016-06-04 (토) 신동립 기자
크게 작게
영화‘곡성’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곡성’(감독 나홍진)이 흥행에 성공했다. 새벽닭이 울기 전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성경 말씀을 연상시키고 좀비까지 동원했으니 프랑스 칸에서도 좋아한 것 같다. 배급사도 무려 20세기폭스씩이나 된다.
사람이 곧 신이라고 주장하는 영화인 듯하다. 천사나 악마도 인간의 선택을 막지는 못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인간이 없는 천사나 악마가 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인간이 중심이다. 의심하는 인간은 선에 안착하지 못한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무명’(천우희)의 말마따나 ‘딸’(김환희)의 ‘아비’(곽도원)가 의심을 하는 바람에 참극은 빚어졌다. 독버섯으로 인한 정신착란이 일으킨 범죄이건만, 아비가 자꾸 의심을 하면서 불행이 꼬리를 물게 된 것이려니 이해한다. 시골 작은 병원에서 원인을 모르면 대처로 나가면 될텐데 ‘외지인’(구니무라 준)을 만병의 근원으로 설정, 정황들을 꿰어맞춘다. 이교도라는 이유로 선교사를 참수하는 무슬림 테러집단과도 닮은 심리다.
무당 ‘일광’(황정민)을 자기 집에 들인다. 외지인이 차려놓은 제단 또는 범죄현장과 매우 유사한 판을 앞마당에 깐다. 동전의 양면도 아니다. 한 페이지의 같은 그림과도 같은 행태로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치려든다. 너무도 쉽게 달콤한 해결사 일광에게 딸을 내준다. 중요한 것도 모르면서 쓸데없이 의심한다고 딸이 소리를 질러도, 무명이 이런 저런 충고를 해도 깨닫지를 못한다. 과연 무능한 경찰관 ‘종구’(곽도원)답다.
‘곡성’은 미국 TV드라마와 코믹스의 압축판처럼도 읽힌다. 1년에 시즌 하나씩을 내놓는 미드는 시청자를 드라마의 우주관 속으로 빨아들인다. 극중 우주관의 보편 타당성이 미드의 수명을 좌우한다. ‘수퍼내추럴’류다. 10년짜리 미드의 우주관을 영화는 달랑 1편에 담아냈다. 종구의 시각에 따라 외지인에게 저주를 당하고 일광에 현혹되며 무명과 조우한다. 종래 그 비극에 젖어들다가 마침내 종구는 넋두리를 한다. ‘어벤저스’에도 가닿는다. 외계와 지구 내부의 적과 싸우는 ‘아이언맨’과 ‘토르’를 즐길뿐 의문을 품는 이는 없다. 특히 평자들이 ‘곡성’에 호감을 표하는 지점일는지도 모른다.
‘곡성’은 끝까지 선과 악이 모호하다. 무명과 외지인과 일광이 종구를 나락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영화의 소실점이다. 꽤 훌륭하다. 외지인과 일광을 선악의 경계에 세우거나 무명을 실패한 수호신 혹은 강신무로 여겨도 종구의 불행을 수용하는 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곡성’은 관객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분명 황당무계 횡설수설이라고 봤는데, 심오한 영화라며 고개를 주억거려야 식자처럼 보인다. 상업영화가 구경도, 감상도 아닌 연구와 토론의 대상이 돼버렸다. 안데르센의 ‘벌거숭이 임금님’이 따로 없다.
머저리 부성애를 할리우드와는 다른, 한국적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냈다는 점만큼은 특기한다.

<신동립 기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