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예술이 무엇이냐는 학생의 질문에 피아노, 고급 자동차, 비행기 등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멋진 ‘제품’이 아닌, 영혼성과 정신성으로 화가의 가슴, 두뇌와 손끝이 표현해내는 마음이 순수예술 ‘작품’을 만든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근 100년 전인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화랑에 가져다 놓은 일은 현대 미술사에 레디 메이드 즉, 작가가 직접 제작하지 않은 오브제의 등장을 가져온 유명한 사건이다.
그 개념 자체가 뒤샹의 예술 작업<사진>이었기에 그는 그 이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50여년 전 앤디 워홀은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고 사진을 이용해 작품을 대량 생산하고 일상에서 친근한 캠벨 수프, 마릴린 몬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초상을 변형하여 조수들이 찍어냈는데, 워홀이 죽은 지금에도 워홀 파운데이션에서 작품을 찍어낸다고 들었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의 하나인 제프 쿤의 작업은 앤디 워홀의 작업보다 한 술 더 뜬 듯한 인상을 주는데, 얼마 전에 카운티 미술관에서 마이클 잭슨과 함께 있는 원숭이 조각을 본 적이 있다. 금박을 입힌 마이클 잭슨과 원숭이의 모습이 무척 조악하고 마치 싸구려 케이크 위에 얹은 크림처럼 느끼하여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조수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100만 달러의 현금으로 앤디 워홀의 엘비스 프레슬리 사진을 사용한 작업을 구하는 한국의 소장가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고, 최근엔 한국에서 워홀 전이 크게 열린 적도 있다. 뒤샹이나 워홀의 작품들이 미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 당시의 미술계에 획기적인 변용을 가져왔기 때문이지만, 앤디 워홀의 작품이 100만 달러에 거래될지언정 그 정신은 99센트의 저급함을 면치 못한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니다.
미국 팝 아트의 기계적이고 비인간화된 정신이 현재의 세계가 직면한 미학적, 정신적 문제들에 비전을 제시하기에 취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돈보따리를 싸들고 99센트짜리 싸구려 미국정신을 사러 다니는 소장가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미 한물간 일부 현대 미술의 제작개념이 현재 한국에서 미술계의 관행이니 아니니, 얘기되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집중된 에너지가 필치에 드러나는 회화에서 대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술사를 알던 모르던 사람 사는 일은 같고, 모르면 차라리 더 명확히 볼 수도 있는 일인데, 변기를 화랑에 갖다 놓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고, 캠벨 수프 같은 상품 로고 찍어내는 일은 또한 얼마나 시시한 개념(!)인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이번 대작 사건이 나기 전에도 조영남 씨의 독창적 아이디어라는 화투짝들이 나에겐 무척 불편한, 수상한 아이디어로 느껴졌고 사건이 나고 서구의 한물 간 미술사조를 도용한 변명조차 이치에 맞지 않는 듯 보인다. 한 때는 형과 아우였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이 불행한 사건이 비윤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자명하게 알 수 있다.
응당한 처벌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이 또한 사람의 일이다. 유명 연예인이기에 과도한 여론 재판에 던져져 처참한 수치를 겪는 70 노인의 고독한 상태를 바라보며, 화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예술이라는 것은 엄청난 자유를 허용하는 준엄한 정신의 산물이고, 삶의 한 가운데서 태동하는 것이기에 언젠가 긴 세월이 지난 후 과감히 화투짝을 던져버리고, 모호한 미학의 오류를 관통해 뛰어넘은 작업으로 새로운, 조영남이 직접 그린 그림 세계를 감히 상상해본다. 화가로 산다는 것은 원래 무척 고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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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숙/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