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이 없으면 인생사는 맛이 사라지면서 한 번 사는 인생 헛살거나 대충 살기 쉽다. 하지만 지나친 꿈은 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힘들게 만든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허황된 꿈이라든지, 주변 생각은 안 하고 자신의 욕망 달성에만 집중하는 과도한 야망이라든지, 구체적인 목표 설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백일몽 같은 게 그런 것들이다.
그 면에서 나도 좀 부끄러운 게 있다. 아내가 꿈돌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정도로 밤에 꿈을 잘 꾸는 편이다. 거의가 다 개꿈들이어서 어쩔 때는 말 꺼내기도 민망할 정도의 이상한 사건들에 연루되곤 한다. “그건 평소에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 거야”는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그 허황됨이 지나쳐 온종일 나의 정신을 상하게 하는 경험들이 가끔 있는 걸 보면 나의 매일 밤의 꿈들은 그리 건강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
현실적 의미에서의 ‘드림’이라는 말에서도 나 역시 제외될 수 없는 인물이다. 나도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근본은 ‘성공’에 있다. 물론 그 성공의 의미가 이민자마다 다를 순 있겠으나, 그들의 성공은 거의 대부분 경제적 부, 그로 인해 따라오는 사회적 신분 상승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민자들은 만나기만 하면 그런 아메리칸 드림의 표본들로서의 성공적 전설들을 여전히 읊조리고 있다.
문제는 그것의 성취 이후이다. 그 드림 성취의 끝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는데,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 같은 게 있다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특히 이민자들의 경제적 성공이 사회적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자식들 잘되는 것일 게다. 그래서 돈 벌고 빚까지 내어 좋은 대학 보내는 데 다들 열심이다.
최근 한 기사에서 ‘드림대학’이라는 표현을 보았다. 근데 진정한 의미의 드림대학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가까운 S대학, 동부의 아이비리그 대학, 돈 많이 내는 명문 사립대 등이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그 어딜 가도 그 학교 입학이 꼭 성공과 등식을 맺어주는 것 같지는 않다. 동부 살 때 일이다. 자녀들이 명문대 들어가면 부모들이 많이 자랑한다. 그런데 사오년이 지났는데도 조용하다. 아직 졸업을 못한 것이다. 그러니 드림대학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정말 가고 싶은 대학이 있었다. 그 학교는 나의 드림대학이었다. 그러나 학력고사 성적이 모자라 그 근처에도 못 갔다. 그 후회의 깊이와 좌절의 길이가 얼마나 질겼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 이후에 얻은 신앙이 그걸 극복케 한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건 나의 현재의 모습 때문이다. 그 대학 나온 한 친구와, 그 대학에는 한참 뒤떨어진 대학을 간 나를 비교해보면서 오히려 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그 친구가 그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특별히 나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가졌다든지, 돈을 더 많이 번다든지, 질 높을 삶을 산다든지, 더 예쁘고 좋은 아내를 얻었다든지, 더 잘나가는 자녀들을 키운다든지, 이런 게 아닌 걸 알고서, 아, 이게 그저 한끝 차이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땐 정말 그랬다. 이 대학 가면 나의 모든 게 다 이뤄질 거라는 막연한 소망 속에서 살았다. 얼마나 크게 속고 살았었는지.
이민자들도 비슷하다. 미국 오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것 같은 마음들이 있다. 그러나 살아봐서 알지만 미국이 결코 내 맘대로 되는 데가 아니다. 오히려 한국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데가 미국이다. 그래서 당부하고 싶은 건, 한국이든 미국이든, 이 대학이든 저 대학이든, 어느 한 쪽으로 모든 걸 걸어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드림 대학도, 드림 이민도, 드림 직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거길 가도 내가 꾸었던 그 드림이 완전하게 성취되지도 않는다. 그 어디서든 그곳에서 어떻게 사느냐, 이게 더 중요하다.
성경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내일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는 미래의 종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미래를 놓고 전전긍긍하는 염려에 빠져 오늘을 껍데기로 사는 것은 부정한다. 그러므로 드림이라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다. 오늘을 성실하게 살지 못하는 자가 꾸는 꿈, 그건 허황된 드림일 뿐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케 하고, 오늘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신실히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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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