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97) 서부 개척④

2016-03-25 (금)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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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업의 개발
광부, Cowboy, 군인 등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않고 자주 옮겨 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대개 독신남자들이나 하던 직종들이었다. 한 곳에 계속 정착하면서 가족들의 일손도 필요했던 서부의 농업은 결혼한 부부들이 이주해 오면서 뒤늦게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애초에 미국의 농업은 동서로는 일리노이 주와 아이오와 주의 사이, 남북으로는 캐나다와 텍사스 주 사이에 있는 대평야 지대에서만 지어졌다. 이 지역은 기후가 좋고 정기적으로 충분한 강우량이 있는 옥토로써 키 높은 풀들과 나무들도 많이 자라는 곳이었다 그러나 서부로 옮겨온 초기 농사꾼들이 개척하기 시작한 서부의 대평야 지대는 사막의 사촌 쯤은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농토로 개발 하기가 힘든 땅이었다.

일년내내 강우량이 적어서 키가 작은 풀이나 자라고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곳이었다. 가끔 벼락이 땅에 떨어져서 풀에 불이 붙기 시작하면 온 평야가 불에 휩싸이기도 하였고, 봄에는 홍수, 여름에는 한발과 찜통더위, 가을에는 태풍같은 강풍이 불고 겨울에는 많은 눈이오고 엄청나게 추운 곳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 살 곳이 못되었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이주를 시작한 농사꾼들은 나무가 전혀 없던 까닭에 흙으로 오두막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다. 큰 창문을 낼 수가 없었던 이 흙집들은 내부가 항상 어두웠고 비가 오는 날에는 천정에서 빗물이 새어 내려오는 불편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목조집에 비해서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장점이 있었다. 또 태풍에도 꿈적없이 안전했을 뿐만 아니라 광야가 산불에 쌓이더라도 흙집은 화재를 완전히 피할 수 있었다.

자리잡힐 때까지 우선 흙집에서 기거하기로 작정하더라도 나무가 한 그루도 자라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난방은 고사하고 음식을 조리할 땔감이 없었다. 처음에는버팔로 똥을 말려서 연료로 썼으나 곧 버팔로들이 종적을 감추어서 사육하던 소들의 똥도 말려서 썼으며 해바라기 줄기도 썼고 잡초를 말려서 쓰기도 하였다. 종국에는 기차가 실어오는 석탄을 사서 연료문제가 해결되었다.

때로는 하늘을 까맣게 뒤덮는 메뚜기떼가 나타나 농작물을 포함한 모든 식물들을 삽시간에 다 먹어 치워 버리기도 하였다. 견디다 못한 농촌인구 3만 명이 한해 여름에 농토개발을 포기하고 떠나면서 “캔사스 는 하늘에서 메뚜기, 불, 재앙이 내리는 곳이다” 라고 마차에 써붙이고들 갔다고 한다.

억척스럽게 뿌리를 깊히 박고 두꺼운 멍석을 깔아놓은 것 같이 자란 떼잔디를 초기 서부
농사꾼들이 치우는 것은 무척 힘는 일이었다. 유럽에서 가져온 쟁기들은 이 떼잔디를 뽑아내지 못하고 부셔젔다고 한다. 이 광활한 평야를 농토로 개발하는 일은 광업이나 목축업 못지않게 힘든 일이었다.

초기 개척시대의 서부여성들은 남자들 못지않게 고된 일을 했어야 했다. 가끔 습격해오는 원주민들을 대항해서 남자들과 함께 군인노릇을 했고, 농장노동자와 목축업자가 되었다가 가정주부이며 아이들에게는 엄마와 동시에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여성들의 이와같은 억척스러운 헌신과 희생이 없었으면 서부의 농지개발은 불가능 했다고 한다.

여성들의 동반자로써의 막중한 임무수행은 일찍이 여성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도록 되어서 와이오밍 주는 1868년에 미국에서 처음으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주었고, 미국 최초의 여성주지사들이 서부 주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고 보는 역사가들이 있다.

황무지를 뚫고 나가는 대륙횡단 철도의 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 연방정부와 각 주의 정부들은 철도를 놓을 땅과 그 땅 좌우의 넓은 땅들을 철도회사들에게 무상으로 주었다. 철도가 건설되지 않으면 어차피 개발될 수가 없는 땅들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부동산 으로서의 값어치가 전혀 없는 땅들이었다. 그러나 일단 철도가 건설되고나면 완전히 얘기가 달라졌다. 철도주변의 땅들은 석탄과 생활필수품을 기차로 수송을 받을 수 있고, 농산물을 기차로 도시에 팔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지역으로 둔갑했던 것이다.


철도회사들은 정부에서 무료로 받은 땅을 비싼 값에 팔 수가 있었고, 농촌인구의 증대는 많은 것을 철도회사에 의존해야 하는 단골손님의 증대를 의미하였다. 철도회사들은 유럽에 이 땅들을 광고 하였고 나중에는 농업인구를 유치하기 위해서 정착할 수 있을 때 까지 살 수 있는 집도 지어 주었고 정착자금도 융자해 주었다고 한다.

거의 무제한으로 있던 것은 개척이 않된 땅이었기 때문에 각급 정부들은 무상 으로라도 땅을 주어서 농업인구를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드디어 링컨 대통령은 Homestead Act of 1862 를 입법하도록 하였다. 이 법은 21세가 넘은 사람들은 누구든지 (불법이민자라는 용어는 없던 때이던 까닭에) 앞으로 미국시민이 되고 무상으로 받은 땅에서 5년이상 농사를 짓겠다고 서약만 하면 미개척지 160 에이커를 불하해 주었다.

개척과정의 농토의 수확이 충분하지 못할 것을 고려하여 일년중 6개월은 다른 노동을 하거나 벌목장의 인부 등으로 나가서 일하는 것도 허용해주고 5년이 지나면 땅의 소유권을 주도록 하였다. 얼핏 듣기에는 횡재같은 혜택이었지만 사실은 엄청난 피땀이 들어가야 얻게되는 농토이었다. 대개 하천이 없는 건조한 땅들이었음으로 지하수를 풍차펌프로 뽑아올려서 사람들과 가축의 음료수로 써야 했고, 살 집을 짓고 땅의 경계선에 기둥을 박고 철조망을 치려면 1천여 달러의 비용이 들었는데 많은 이주자들에게는 이 액수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철조망은 당시까지 방목되고 있던 남의 소들이 자기 농토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였다. 먼곳에서 운반해야만 했던 기둥과 철조망을 쓸 수밖에 없었다. 처음 187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100여종의 다른 철조망들이 제조되어 판매 되었다. 1875년에 일리노이 주의 한 농부가 제조하기도 쉽고 기둥에 설치하기도 간단한 철조망을 발명하여 한몫을 톡톡히 보았다. 드디어 1883년에 최우수개량 철조망이 발명되어 이 회사는 하루에 600 마일의 철조망을 제조했을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땅을 개간하더라도 농업용수의 부족이 문제였다. 농부들은 풍차펌프를 시설해서 식용수는 조달하였으나 농업용수까지 풍차펌프로 조달할 수는 없었다. 이 한발을 극복하고 이 건조한 땅에 농사를 짓기 위하여 유타 주의 몰몬교도들은 Dry Farming 이라는 농경방법을 개발하였는데, 서부의 농부들도 이 방법을 썼다고 한다. 우선 쟁기로 땅을 깊이 파서 긴 또랑들을 만들어 놓고 비가 오면 물이 흘러가지 않고 또랑에 최대한으로 고이도록 하였다. 비가 끝나면 또랑들을 흙으로 덮어서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하였다. 비가 올적마다 대규모로 같은 방법을 되풀이 하여 수분증발이 최소화 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금은의 발견, 광활한 미개척땅, Homestead Act, 대규모의 철도건설, 홍수처럼 몰려온 유럽의 이민들은 서부의 개척과 함께 인구도 급격히 증가되도록 하였다. 캔사스 는 1870년에 36만4,000명이었던 인구가 1890년에는 142만8,000명으로 늘어났으며 같은 기간에 네브라스카 의 인구는 12만3,000명에서 1백6만3,000명으로 늘어났고, 다코타 영토 는 2,000명에서 54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1890년경에 이르러서는 미국건국 초기의 13개주들을 다 합한것 보다도 넓은 서부의 땅들이 불과 6년 사이에 새 이주자들에 의하여 개척되었다고 한다. 캔사스 는 1861년에, 네바다는 1864년에, 네브라스카 는 1867년 에, 콜로라도 는 1876년에, 1889년에는 North and South Dakotas, 몬태나, 워싱턴 등이 주가 되었고 1890년에는 아이다오와 와이오밍이 주가 되었다. 1863년에는 애리조나가, 1890년에는 오클라호마가 새 영토가 되었다가 얼마 후 주들로 승격하였다.

오클라호마 주는 원래 1834년에 Cherokee, Seminole 등 다섯 개의 문명한 미국원주민 부족들을 조지아,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등지의 동남부지역에서 강제로 이주시켜서 살도록 떼어놓은 거대한 수용소였는데, 새 이주 희망 백인들의 압력에 이기지 못하여 연방정부가 땅의 일부를 원주민들로부터 사들여서 1889년에 백인들에게 개방함으로써 원주민들은 이 땅에서 조차 주도권을 잃게 되었었다.

<<조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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