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길에서 본 스승

2016-03-19 (토) 01:59:04 김영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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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지금 손님처럼 내 집 문밖에와 있다. 봄을 맞는 바람은 따뜻하기도 하고 매섭기도 하다. 밤새껏 내린 비에 말끔히 겨울 먼지가 씻겨나고 물이 오른 나뭇가지에 잎들이 다시 돋아난다.

꽃망울에서 터져 나오는 생명의 회생은 잠자던 내 오감을 일깨워준다.

봄의 꽃들은 긴 겨울의 침묵과 어둠, 죽음을 이기고 피어난 생명의 절규이므로 일어서서 박수를 쳐야할 것 같은 심정이 든다.


시간은 자연의 숨결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가면 철이 바뀌고 철이 바뀌면 자연은 그 빛깔을 바꾼다. 자연은 약속이나 하듯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로 순환하며 살아 돌아오지만 사람은 한 번에 인생의 사계절을 보낸다. 한 생애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하나 인간의 일생이 자연의 사 계절과 닮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인생의 처음 계절 봄은 싱그러운 어린이의 계절이고, 풋풋한 젊음은 청소년의 계절 여름이고, 청장년의 계절은 결실을 거두는 가을이고, 쓸쓸한 노년의 계절은 겨울이 아닌가,
봄기운을 받고 싶어 집 밖을 나서 공원을 향해 걸으면서 담장이 없는 길가 주택 화단을 바라보게 된다. 예쁜 꽃들을 피워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화단이다.

마침 내 앞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이 너덧 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손녀가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을 매만지기도 하고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할머니와 손녀가 서로 사랑하는 그 모습을 보니, 지는 꽃과 바로 피는 꽃이 마주 하는 듯하고, 봄과 겨울을 보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손녀가 가던 걸음을 멈춘다. “할머니저 꽃 좀 봐, 예쁘지?”하고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작은 손가락으로 꽃송이를가리켰다. “그래, 참 예쁘구나” 할머니가 꽃을 바라본다.

“할머니, 저 꽃 예쁘니까 나 갖고 싶어. 꺾어 줘.”
순간 할머니는 손녀를 바라보더니 손이 꽃을 향하여 다가간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말한다. “아가야, 꽃이 예쁘지? 예쁘니까 혼자 가지면 안 돼. 꽃을 꺾으면 꽃이 아프다고 아야야 한단다.”
할머니는 손녀의 고사리 손을 꼭 잡고 화단 앞을 지나 걸어간다.


순간 잔잔한 기쁨이 내 가슴에 내려졌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머리 위에 환한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어디에나 있고 우리를 지혜롭게 해주는 것은 학문이나 지식만이 아닌 것이다.

봄날 하오에 생명을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귀하게 여기는 정신을 보았다.

그 정신을 일깨워주고 실천으로 보여준 스승은 길에서 잠깐 내 앞을 스쳐간 이름 모를 할머니였다.

<김영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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