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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칼럼] 두 번째 맞이하는 부친 추모일에 부쳐

2016-03-02 (수)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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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일 오늘은 부친(이하는 더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겠다)과 이별한 지 꼭 2년이 되는 날이다. 오후 네 시쯤 운동하고 돌아오던 중 시애틀에 사는 형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형은 워낙 말수가 적은데다 아주 특별한 일 아니면 내게 전화하는 법이 없어 휴대전화에 형 번호가 찍히면 겁부터 덜컥 난다. 그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위독하셔. 오늘을 못 넘기실 것 같아.” 그 전화가 있은 지 두 시간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향년 87세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할머니 임종을 지켜본 후 난 오십 줄 되도록 직계가족의 죽음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다. 그랬으니,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와 늘 함께하실 것만 같았던 아버지의 임종이었기에 그 충격과 후유증은 더 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은 우리에게 늘 ‘망각’이라는 마약을 주사해 주는 법. 나 역시 2년의 세월 속에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그 약효에 빠져 평범하게 잘 살아왔다.

추모일은 약기운에 취해 있던 날 깨워 주는 얼음물과 같다. 그래서 3월 3일 오늘은 내게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주며,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되찾게 한다. 이 날은 또, 만약 아버지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만약 어머니와 결혼하시지 않았더라면 난 과연 존재했을까, 그토록 사랑스러운 나의 두 자녀들 역시 존재했을까, 식의 다소 생뚱맞은 상상의 세계로 날 안내해 준다. 그래서도 내 곁에 오랜 시간 같이 계셔 주신 게 더 고마울 뿐이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고마운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아버지는 내게 ‘문과적 소양’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신 분이셨다. 미국 이민 오시기 전 한국 계실 때 아버진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가르치셨던 과목은 국어와 한문이었다. 과외로는 사시던 지방에서 동시 시인으로도 활동하셨다. 그 덕에 난 어렸을 때부터 글을 가까이하게 되었고, 내 또래들이 하기 싫어하는 한문 공부도 상당히 이른 나이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집엔 상당 분량의 문학전집이 있어서 기나긴 나의 여름과 겨울방학은 그 책들을 독파하는 기간이었다.

그런데 이게 나의 진로 설정에 오히려 장애가 된 적이 있었다. 나의 청소년기는 유신개발독재시대였다. 그땐 성공의 지름길로 가려면 상대 아니면 공대에 진학해야 했다. 문과에만 능하면 평생 배고프게 살기에 딱 알맞은 시대였다. 잘해야 선생질? 그 때문에 그런 문과적 유전자를 물려주신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다. 목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목사만큼 말과 글로 표현해야 할 일이 많은 직종도 없기 때문이다. 그때 읽었던 책들, 그때 경험했던 사유하는 태도, 그리고 그때 그나마 좀 키워놨던 예술적 끼까지, 지금 난 그 모든 걸 나의 목회생활에서 거의 이백 퍼센트로 잘 활용하고 있다. 다 아버지 덕분이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전승이다. 난 흔히 말하는 대로 ‘모태신앙인’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다. 부모님 두 분 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니셨다. 결혼식도 교회에서 하셨다. 사남매를 낳아 키우셨는데(난 그 중 막내다) 그 덕에 사남매 다 큰 무리 없이 신앙생활을 잘해왔다. 아버지는 장로로, 어머니는 권사로서 교회에서 중추적인 리더십을 발휘하셨다. 사위 며느리들 역시 다 대를 이어 교회에서 장로 아니면 권사들이다. 그리고 막내인 난 목사까지 되었다.

나 스스로를 잘 알기에 하는 말인데, 만약 내가 신앙생활 안 하셨던 부모를 만났더라면 난 목사 되기는커녕 교회 근처에도 안 갔을 것이다. 물론 목사가 되기까지는 중간에 예기치 않은 인생도약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꾸준한 신앙인이자 진지한 목회자가 되기까지는 신앙의 유전자를 전승해 주신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이것도 아버지가 고마운 또 하나의 이유이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늘 젊고 강인하셨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도 흐르는 세월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셔서 지금 내 곁을 영원히 떠나셨다. 아마 나 역시도 나의 두 자녀들에게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그래서도 한 번 사는 인생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아버지께 받은 그 두 유산들을 내 두 자녀들에게 더욱 더 풍성하게 남겨주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건강한 인생 각오가 내 의식 안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날, 그래서 오늘이 참 좋다.

<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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