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심리학자 폴 트루니에는 자신의 책 <서로를 이해하기 위하여>에서 부부간에는 ‘성격 차이(emotional incompatibility)’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성격 차이란 이혼소송을 맡은 변호사들이 지어낸 근거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들 부부로 살아봐서 알지만 어느 부부에게든 명백한 성격 차이가 있기에 이에 저항하고 싶은 맘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로라는 유명 연예인들의 이혼사유로서 이 성격 차이가 잦은 핑계거리로 들먹여지는 걸 보면 그의 단언은 과히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지금의 우리는 대부분 허구적 사랑에 사로잡혀 있다. 픽션을 논픽션으로 쉽게 가장시키는 현대적 주범은 엔터테인먼트다. 영화, 드라마, 연예인들의 포장된 삶, 광고, 소셜 네트웍, 그리고 베스트셀러 소설이 독차지하고 있는 이 세계는 허구에 뒤덮인 실제를 마치 인생의 참 단면인양 착각케 한다. 남녀 간의 사랑 문제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애용되는 메뉴감이다.
그럼 그 세계에서 표방하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대부분 ‘자동발화 식’ 사랑이다. 시쳇말로 “한 순간에 뿅 가는” 식의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없다. 있긴 하겠으나 그것은 너무나도 일시적인 것이기에 사실은 없다고 봐야 맞다. 더 큰 착각은 한 순간엔 뿅 간 그 사랑이 죽을 때까지 ‘저절로’ 계속될 거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참된 사랑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 더 거대한 신화임을 알아야 한다. 성격 차이라는 이유를 대며 이혼을 서두르는 연예인들 역시 이 신화에 철저하게 농락당한 셈이다.
그렇다면 참된 사랑은 어떤 걸까? 일단 확실한 것은 사랑은 결코 ‘자동발화’로 성립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의지로 시작해 의지로 끝난다. 사랑의 정점인 결혼이 그것을 말해 준다. 결혼식에서 제일 엄숙하고도 진지한 순간은 서로에게 결혼서약을 묻는 대목이다. “신랑 OOO는 신부 OOO를 아내로 맞이하여,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끝까지 함께할 것은 약속합니까?” 이 문장 어느 곳을 살펴봐도, 대답하는 이의 ‘예’라는 대답이 저절로, 또는 자동으로 나오기가 힘들다. 다 대답하는 이의 의지적인 답변을 끌어내기 위한 추궁조(?)의 질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책임으로 시작되어 책임으로 완성된다.
직업이 목사이다 보니 결혼식 주례할 일이 많다. 주례자에게 가장 좋은 일은 주례를 해 준 그 부부가 결혼서약에서 했던 그 대답 내용처럼 끝까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반대로 주례자에게 가장 힘든 일은 주례해 준 그 부부가 중간에 파경을 맞이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의 주례 역사를 되돌아보니 내게도 그 힘든 일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주례를 해 주었던 부부들 가운데 이미 갈라선 부부가 몇 있다. 그래서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괜히 주례를 했네 하는 후회감이 드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사랑을 계속 논하다 보면 그 정점에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내어주는’ 사랑이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사랑 말이다. 그는 신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래야 맞지, 이렇게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특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인과응보 논리에 익숙한 우리로서 그렇게 쉽게 말하는 것은 오만불손하기까지 하다. 법대로 하자고? 오케이. 진짜 법대로 한 번 해볼까? 법대로 한다면 가장 먼저 재판정에 끌려가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할 자는 바로 남이 아닌 내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죄로 버무려진 자가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위해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다 내어놓은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게 하셔야만 했던 이유는 그런 ‘초법적 의지’의 방식이 아니고서는 구제가 불가능한 대상이 우리 인간들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의 아내와 남편에게 그 사랑을 나눠주고 싶은가? 그러고 싶다면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사랑은 자동적 감정이 아닌 의지적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없는 사랑은 다 허구에 불과하다. 사랑은 발렌타인 데이 같은 날 초컬릿이나 꽃다발 교환하는 정도로 달성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진지한 인생 주제에 속한다. 얼마나 무거운 걸까? 그 무게는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던져야만 덜어낼 수 있는 무게였다. 그런 무거운 무게의 사랑. 그게 진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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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숭 목사/ 새크라멘토 크로스포인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