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통령의 자격

2016-01-20 (수) 10: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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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미국은 지금과 같은 강대국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야만인들이 사는 황무지로 생각했던 아메리카 신대륙의 대서양 연안에 자리 잡은 식민지 연합체에 불과했다. 대다수 유럽인들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식민지 민병대가 당시 최강이었던 영국을 상대로 싸워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봤다.

이런 미국에 대한 과소평가는 미국이 8년에 걸친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기적적으로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다수 미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이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 같은 유럽의 강대국에 비해 턱없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들이 쳐들어와 나라를 집어 삼킬까 두려워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 나온 것이 연방 헌법 2장 1조 5항의 규정이다. 헌법은 대통령의 자격에 대한 규정에서 미국 대통령은 ‘선천적 시민권자’(natural born citizen)만 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미국의 창립자들이 이런 규정을 둔 것은 영국이나 프랑스인들이 미국으로 귀화해 출마한 후 대통령이 돼 나라를 들어먹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연방 헌법 제정에 참여한 존 제이 초대 대법원장은 조지 워싱턴에게 쓴 편지에서 대통령 자격을 ‘선천적 시민권자’로 제한한 것은 “외국인들이 연방 정부에 들어오는 것을 강력하게 견제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연방 의회는 연방 헌법이 제정된 지 불과 3년 뒤 ‘귀화법’을 제정해 선천적 시민권자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미 시민권자의 자녀는 태어난 곳이 어디든 상관없이 ‘선천적 시민권자’다. 이는 미국법이 따르고 있는 영국법의 전통에도 부합한다. 영국도 부모가 시민권자인 이상 태어난 곳이 어디든 묻지 않고 선천적 시민권자로 인정하고 있다.

최근 테드 크루즈 연방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면서 그가 캐나다 태생이라는 사실이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이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은 그의 부상으로 1등자리를 위협받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다. 그는 크루즈가 대통령이 될 경우 선천적 시민권자냐 아니냐를 놓고 소송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며 이는 공화당에 불행한 일이 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64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는 애리조나가 미국 주가 되기 전 애리조나에서 태어났고 2008년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존 매케인도 파나마에서 태어났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매케인이 크루즈 자격에 문제가 있다고 트럼프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트럼프 못지않게 반이민적인 정책을 주장하는 크루즈가 출생 문제로 대선 후보 자격을 공격받고 있는 것은 고소한 일이지만 쿠바인을 아버지로, 미국인을 어머니로, 캐나다에서 태어난 크루즈는 분명 ‘선천적 미국인’이다. 그는 대통령으로 자격 미달인 인물이지만 출신성분 때문은 아니다. 이제 유능한 귀화 시민권자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는 이 조항 폐지를 검토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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