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의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앤드류 존슨 대통령의 실정과 쉽게 풀리지 않는 남북간의 근본적인 불화로 남북전쟁 종전 후의 미국의 정치는 심각한 혼돈에 빠져 들었다. 참신한 새 지도자를 원하던 국민들의 열망 속에 선출되었던 Ulysses Grant 대통령의 무능력, 무기력으로 4년동안 정치적 혼돈은 더 계속 되었다.
패전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던 남부 백인들과 민주당이 다시 기세를 올리며 남부 주들의 정권을 잡아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랜트 대통령 1차 임기 말부터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미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진데 이어서, 그랜트 2차임기 시작 때부터 노출되기 시작한 공무원들의 부정사건들과 특히 그랜트 각료들의 부패가 발각되자 집권 공화당은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공화당이 남북전쟁 이후의 선거때마다 써오던‘피에 얼룩진 셔츠 휘두르기’식의 선거운동 은 국민들에게 더 먹혀들어 가지 않아서 그랜트 2차 임기 2년째인 1874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공화당은 다수의 의석들을 잃었고,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이 하원의 다수당이 되었다. 만일 그와 같은 추세가 계속된다면 2년 후에 있을 대통령선거 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커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1876년의 대통령선거를 치루게 되었던 공화당에서는 그때까지 가장 유력한 대통령후보로서 거론되고 있던 하원의장이 어느 철도회사를 후원해주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자 그의 지지도가 떨어져서 3선 출마를 기도했던 그랜트와 경선하게 되었는데, 여섯 번 투표를 해도 공천후보 결정이 나오지않자 공화당은 일곱 번째 투표에서 타협후보자로 Rutherford B. Hayes 오하이오 주지사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Hayes 는 검사로 일하다가 남북전쟁에 북군으로 참전하여 육군소장으로 예편된 후 연방 하원의원을 거쳐 오하이오 주지사가 된 사람이었는데, 정직한 개혁주의자라는 평판이 있었고 남부문제들에 대해서 비교적 온화한 생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오하이오 주에직업공무원제도를 처음으로 실시하였다고 한다. Hayes 의 공천은 공화당 내에서 급과파들의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주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민주당은 Samuel J. Tilden 뉴욕 주지사를 대통령후보로 공천하였다. Tilden 은 Hayes 보다 더 강력한 개혁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당시에 뉴욕시에서는 Tammany Hall 이라고 불리던 뉴욕시 민주당의 일파가 William Tweed라는 정치보스의 배후조종으로 시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모든 시정부 사업의 계약자들이 싯가의 두 배로 시정부와 계약을 하도록 한후 그 절반을 횡령하여서 총 4,500 만 달러 (1억달러였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음) 을 횡령하였다고 한다.
아무도 감히 막강한 Tweed에게 손을 대지 못하고 있을 때에 Tilden은 Harper’s Weekly 라는 잡지에 시사만화로써 Tweed 의 부정부패가 연속적으로 폭로되도록 만들어서 Tweed 를 부정이 근절되도록 만든 정치적 용기와 사법적 능력을 가춘 사람이라는 호평을 듣고 있었다.
1876년의 대통령선거는 미국 역사상 가장 극렬했던 대통령선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민주당은 정말 오랜만에 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고 공화당은 정권을 뺐끼지 않으려고 분투하였던 것이었다. 선거전쟁이 격렬하였는데 개표결과는 더욱 가관이었다. 양 후보의 선거인단 득표수가 비등하였을 뿐만아니라 몇 주의 투표결과에 정치적 혼돈이 있었다.
개표결과 선거인단 표 수로 Tilden 이 과반수에서 한표가 모자라는 184표를 얻었고 Hayes 는 165표를 얻어서 일단은 Tilden 이 당선되어가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국민들의 투표수로만 치자면 Tilden 이 Hayes 보다 25만표 정도를 더 얻었다고 한다. 그런 아슬 아슬한 상태에서 미국 역사에 기록되는 혼동이 일어났다. 당시까지 공화당이 정권을 쥐고 있었던 도합 19개의 선거인단 표수를 가지고 있던 남부의 3개주, 사우스 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가 각각 두개의 선거결과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공화당측 보고서들은 Hayes 가 전부 승리하였다고 하였고, 민주당측 보고서들은 Tilden 이 모두 승리한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은 대부분의 주에서 그 주의 투표결과를 주무국장 (Secretary of State) 이 확인 서명하도록 되어 있지만 1876년 선거당시에는 투표결과 확인절차가 분명치 않았던 듯하다. 여기에다가 오리건 주에서도 한 표가 불확실한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 20개의 선거인단 표의 처리결과에 따라 어느 당이 정권을 잡느냐가 결정되게 되어 있었다. 만일 이 20표 중 한표만 Tilden 에게 주어 진다면, 아니 20표 전부가 무효라고 결정된다면, 정권이 민주당에게 넘어가게 되어있었고, 공화당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0표 전부가 Hayes 에게 넘어가야만 하는 심각한 국가적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그야말로 선거가 “투표가 아니라 개표에 달려있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미국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미국이 혁신적인 문물을 많이 개발하고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는 나라인 것으로 잘못 아는 수가 많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영국에 이어 “산업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만큼 문물의 발명과 개발에 혁신적으로 모든 나라들을 앞섰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한번 발명해 놓은 정치제도나 전통을 쉽게 바꾸지 않는 보수성 (국민성?) 이 있다.
미국역사를 보면 대개 중요한 제도나 법률이 개정되기에는 몇 년, 더러는 몇 십 년 간의 논쟁, 토론, 투쟁이 있은 후에나 개정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군정이나 독재정치에 익숙해져 있던 외국사람들이 보기에는 답답할 정도로 변화에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보수성은 성급한 판단으로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피해온 것임을 미국 역사는 또한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이 현대 선진국가들 중 가장 어린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오래된 헌법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도 이런 미국사람들의 보수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은 지난 250여년간 한번도 개헌을 한 적은 없고, 필요에 따라 매번 오랜 토의 끝에 필요한 부분만 개정해 왔었다. 얼핏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헌법이 누더기 이불처럼 보이지만 그 이불을 덮고 사는 미국인들에게는 미국 헌법이란 운치도 있고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원상태로 잘 보관만 되면 값이 점점 더 올라가는, 귀한 골동품같은 것이다. 쉽게 고치지 않기로 서로 약속한 다음에는 이 헌법이 일상생활의 지침이 되도록 비교적 잘 존중되어 오고 있다.
미국의 Founding Fathers 들이 헌법을 제정하였을 당시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항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는데 , 미국은 그 때마다 작은 홍역을 치루는것같은 진통을 겪으면서도 서서히 위기를 극복해 나왔다.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대법원의 판례로, 국회의 입법으로, 느리지만 합헌적인 방법으로 난제들을 서서히 처리해 왔다. 민주주의적인 절차에 따라서 ….. 그래서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아직 몸에 배지 못한 외국인들중에는, “민주주의란 미국같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나라나 실천해 볼 수 있는 사치품이다” 라는 착각도 하게 하면서…
아마 미국의 정치제도 중에 가장 혼동스럽고 당장에 뜯어 고쳤으면 싶은 것이 미국 대통령선거제도가 아닌가 싶다. 몇 군데만 고쳐 놓으면 될 이 대통령선거제도는 “각주가 독립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된 제도라서,” “연방법과 주법을 동시에 적용해야 하는 까닭에,” “아직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 등등 우리 같이 성질 급한 사람들에게는 말도 되지않는 이유를 들먹여 가며 기존의 혼동스러운 제도를 고집해오고 있다. 벌써 선거제도의 약점 때문에 여러 번의 정치적인 위기를 경험하고 난 지금에도 대통령선거제도개선을 위한 움직임은 별 힘을 못 얻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신통하다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에 관한 헌법과 법률들이 허점과 약점 투성이였다면 미국은 망했거나 계속 혼돈 속에서 허우적 거려야만 했어야 한다. 그런데 삼류급 대통령들을 다 포함해서 평가하더라도 미국 대통령들의 평균점수는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미국사람들은 제도적 약점을 초월해서 투표를 잘 해왔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종차별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사람들은 국민의 권리보호를 위해서는 잘 단합해 왔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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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