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탑에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직업 특성상, 여름방학 중 1개월을 한국에 머물며 일했다. 오랜만에 한국에 가면 만나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물론 먹고 싶은 음식은 더 많아서 항상 시간과 체력이 부족하다.
그렇게 제한된 시간을 분배할 때 나는 그동안 항상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소홀했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외가댁에 갔는 데 그것은 초등학생 시절 이후 처음 발걸음이었다. 고백하자면 그 짧았던 1박2일의 방문조차 미국에서 가르친 한인 대학원생의 결혼식이 마침 엄마의 고향에서 있었기에 핑계(?)김에 만들어낸 기회였다.
집집마다 사연이 있지만, 우리 외갓집의 가장 큰 사연은 4남매를 낳으신 외할머니가 막내딸이 한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셋째인 우리 엄마는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직후 돌아가셔서 내게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이제 그 4남매는 모두 각자 다른 도시에 살고 있고, 외삼촌 한분만 고향에 살고 계신다. 이번 여름 내가 방문하며 모처럼 엄마와 이모 한분을 모시고 가니, 3남매가 오랜만에 한자리에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분들이 연세가 있으시니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외삼촌마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울고 웃고를 반복하시는 거였다.
흥미롭게도 이번 여행에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이름도 알았고, 그 분의 치맛바람(?)은 대단하셨으며, 외할아버지께서 얼마나 풍채가 좋으시고 술을 즐기셨는지 등 그분들의 성격과 외모, 그 성격들이 빚어낸 일화들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처음으로 외할아버지 산소에도 들러 인사드렸다. 살아계실 때 보지 못했던 손녀가 이만큼 커서 갔으니 외할아버지도 꽤나 놀라셨을 것 같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가족사를 듣고, 보고, 알게 되니 이제야 나는 개인의 역사나 가족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지 깨달을 수 있었다. 다양한 퍼즐 조각들을 맞추어 보면서 왜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가 되었는지, 왜 내가 나인지를 이해하게 되는 계기라고나 할까?또한 일찍 엄마를 여의고 자라야했던 어른들이 이제야 비로소 그때의 기억들을 마주하고 울고 웃으며 서로 나눌 여유와 용기를 가지게 되고 감정들을 공감할 수 있었으니, 듣는 나 역시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일개 개인사와 가족사도 마주하는 데 용기와 성숙함이 필요하고 이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나 같은 후손은 실체를 보고, 듣고, 만지고 나서야 공감할 수 있을진 데, 한 국가의 역사는 더 더욱 그런 성숙 과정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광복 70주년 행사가 화려하게 지나갔지만 여전히 어떤 개인들에게는 고향이 휴전선 너머에 있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실체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차마 사실을 제대로 직면하지 못하고 거짓과 변명을 둘러댈 수밖에 없는 어른들과 그 자손들이 있다.
얼마나 더 성숙하고, 용기를 내어야 온 국가가 솔직하게 지난 이야기를 하며 울고 웃을 기회가 생길까. 아직도 한참 멀어 보이다. 사과를 하라고 주장하는 게 창피한 게 아니라, 역사 앞에서 사과하지 않는 게 진정 창피한 거라는 걸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말했듯이 말이다.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